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무력으로 엄중히 다스렸다. 헌병이 경찰업무까지 관장하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일절 금지했다. 걸려들면 즉결처분하고 치도곤을 쳤다. 한국인은 마음 놓고 여행조차 할 수 없었다. 이른바 무단통치인데, 숨통을 죈 민족탄압이 오히려 3ㆍ1운동을 촉발한 요인이 되었다.
염상섭이 쓴 ‘만세전’(1924)은 주인공 이인화가 3ㆍ1운동 직전 도쿄-시모노세키-부산-서울을 왕래하며 겪은 민족탄압의 실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인화는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을 탈 때부터 검문검색에 시달렸다. “연락선에 들어오기만 하면 웬 셈인지 공기가 험악하여지는 것 같고 어떠한 압력이 덜미를 잡는 것 같은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휴대품까지 수색을 당하고 나니 불쾌한 기분이 한층 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드러누워도 분한 생각이 목줄까지 치밀어 올라와서 무심코 입살을 악물어 보았다.”
이인화가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오는 여정은 더욱 무시무시했다.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드나드는 순사와 헌병 보조원이 차례차례로 한 번씩 휘돌아 나가자 기차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 안은 일제 관헌의 번뜩이는 눈초리와 한국인 승객의 겁먹은 표정이 어우러져 숨 막힐 듯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이 잠자코 앉았으려니까 차는 심천 정거장엔지 도착한 모양이다. 새로운 승객도 별로 없이 조용한 속에 순사가 두리번두리번하고 뚜벅 소리를 내며 들어와서 저편 찻간으로 지나간 뒤에 조금 있으려니까 누런 양복바지를 옹구바지로 입고 작달만한 키에 구두 끝까지 철철 내려오는 기다란 환도를 끌면서 조선 사람의 헌병 보조원이 또 들어왔다. 여러 사람의 눈은 또 긴장해지며 일시에 구랄만한 누렁저고리를 입은 조그마한 사람에게로 모이었다. 이 사람은 조그만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편서부터 차츰차츰 한 사람씩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리로 온다. 누구를 찾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선뜩하였으나, 이 찻간에도 나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까 안심이 안 되었다. 찻간 속은 괴괴하고 헌병 보조원의 유착한 구둣소리만 뚜벅뚜벅 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가슴은 컴컴한 남포의 심짓불이 떨리듯이 떨리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낱낱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지나친 뒤의 사람은 자기는 아니로구나, 살았구나! 하는 가벼운 안심이 가슴에 내려앉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양이 얼굴에 완연히 나타났다. 헌병 보조원의 발자취는 점점 내 앞으로 가까워 왔다. 나는 등을 지고 돌아앉았고, 내 앞의 갓장수는 담뱃대를 든 채 헌병의 얼굴을 똑바로 치어다보고 앉았다. 헌병 보조원은 내 곁에 와서 우뚝 선다. 나는 가슴이 뜨끔하여 무심코 치어다보았다. 그러나 헌병 보조원은 나를 본체만체하고 내 앞에 앉았는 갓장수를 한참 내려다보고 섰더니 손에 들었던 종이조각을 펴본다. 내 가슴에서는 목이 메게 꿀떡 삼키었던 토란만한 것이 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찻간은 고작 헌병 보조원-어린 조선 청년 하나의 한마디로 괴괴해졌다. ‘당신, 이름이 뭐요?’”
이인화는 마침내 대전에서 분통을 터트렸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든 배추잎 같고 주눅이 들어 멀거니 앉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에’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엾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일제의 탄압에 짓눌린 한국은 겉으로 죽은 듯 적막하고 얼빠진 듯 멍청해보였다. 그렇지만 안에서 독립열망은 용광로처럼 끓고 독립의지는 무쇠처럼 굳었다. 그 열망과 의지가 일시에 폭발한 것이 3ㆍ1운동이었다. 일제는 2개 사단 주둔군과 지원군을 동원하여 3ㆍ1운동을 총칼로 탄압했다. 희생자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제 자료는 피살자 630명, 부상자 1,900명, 투옥자 9,000명이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각각 7,509명, 1만5,961명, 4만6,948명이다. 어느 쪽이든 살상불사의 폭력진압을 증명한다. 무단통치의 민낯이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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