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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프랑스는 왜 이교도 오스만과 손을 잡았나

입력
2019.04.27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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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프랑스-오스만 제국의 군사 동맹, 그리고 문명의 충돌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1683년 제2차 빈 침공 시 오스만 군대를 격퇴하고 있는 유럽 연합군의 모습
1683년 제2차 빈 침공 시 오스만 군대를 격퇴하고 있는 유럽 연합군의 모습

우리는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를 ‘문명의 충돌’이라는 시각에서 보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양 세계 간에 어떤 큰 전쟁이 벌어지면 모든 유럽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자기가 믿는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쳐 상대방과 싸웠다는 도식으로 역사를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역사의 장면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음을 금세 발견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가 그렇다. 15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한 후 오스만 제국은 파죽지세로 유럽을 향해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언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고, 두 나라의 우호 관계는 26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왜 이교도 침략자였던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체결했을까?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팽창,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다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인들이 세운 이슬람 제국이다. 투르크인들은 원래 중앙아시아 출신의 기마 유목민이었다.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투르크인들은 9세기경부터 용병의 신분으로 이슬람 제국에 들어 왔다가 차츰 막강한 군벌 세력으로 성장했다. 투르크족 지도자 ‘오스만’은 1299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작은 왕국을 하나 건설했는데 그것이 오스만 제국의 시초가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건국 초기부터 유럽을 향해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들은 1326년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부르사와 1387년 베네치아로부터 테살로니키를 빼앗는데 성공했고, 1389년에는 코소보에서 남슬라브인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발칸 반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오스만 투르크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킴으로써 천년 동안 지탱해온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경악 그 자체였다. 이제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방패막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소식을 접한 크레타 섬의 한 수도원 서기는 “지금까지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1529년 제1차 빈 침공 시 오스만 군대가 빈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는 장면.
1529년 제1차 빈 침공 시 오스만 군대가 빈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는 장면.

오스만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술탄으로 추앙 받는 술레이만 대제(1520~1566년 재위)는 베오그라드와 로도스 섬을 차례로 정복한 후,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마자르인들에게 끔찍한 패배를 안겨주며 헝가리를 차지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3년 후인 1529년 가을에 무려 25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과 300개의 공성포를 대동하고 약 3주 동안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했다. 당시 빈은 유럽 최강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수도였다. 합스부르크 왕국의 수도마저 오스만 제국의 수중으로 떨어진다면, 자칫 서유럽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깃발로 뒤덮일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장대 같은 비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더니 다뉴브 강이 넘쳐 온 땅이 질퍽해졌다. 게다가 날씨마저 추워지고 너무 길었던 보급로 탓에 식량과 군수품이 바닥을 보이자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도저히 전투를 계속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술레이만 대제는 결국 빈을 포기하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합스부르크 왕가 견제 위해 이교도 오스만 제국과 손잡다 

오스만 제국의 빈 침공으로부터 유럽이 기사회생한지 불과 7년 밖에 지나지 않은 1536년 유럽 전역을 놀라게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군주 프랑수아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와 군사 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유럽이 하나로 뭉쳐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도 모자를 판에 느닷없이 프랑스의 군주가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는 황당무계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문명의 충돌’이란 시각에서 보자면 그리스도교 국가인 프랑스가 이교도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16세기 유럽 내부에서 전개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치열한 패권 경쟁을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원래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약소한 가문이었는데 유럽 각지의 왕가와 정략적으로 결혼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세력을 조금씩 넓혔다. 그 덕분에 16세기 무렵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자 카를 5세는 오스트리아, 스페인, 부르고뉴, 네덜란드, 독일, 밀라노, 보헤미아, 헝가리 등 유럽의 약 4분의 1에 달하는 방대한 영토와 함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까지 물려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프랑스의 군주 프랑수와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급격한 세력 확장에 위기를 느꼈다. 결국 그는 1525년에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와 맞붙었지만 오히려 크게 패하고 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프랑수와 1세는 카를 5세와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외부 동맹 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오스만 제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 답례로 1526년 2월 술레이만 대제는 서한을 보내 프랑수와 1세에게 “용기를 갖고 낙담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과 함께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를 도와줄 의사가 있음을 넌지시 내비쳤다.

1536년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가 프랑스의 군주 프랑수와 1세에게 보낸 서한. 외교 관계 수립을 통보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1536년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가 프랑스의 군주 프랑수와 1세에게 보낸 서한. 외교 관계 수립을 통보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당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동맹 논의가 오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합스부르크 왕가라는 강력한 공동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수와 1세는 오스만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빌려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할 수 있었고, 반대로 술레이만은 프랑스를 이용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인 빈을 공략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동맹 협정을 체결한 1536년부터 이듬해까지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하에 있었던 사보이, 밀라노, 제노바 등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 공략에 나섰다. 1543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놓고 합스부르크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프랑스는 오스만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포병부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동맹이 흔들리기 시작한 때는 제2차 빈 침공 이후였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은 20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150여년 만에 두 번째 빈 공략에 나섰지만 유럽 연합군에 어이 없이 대패하고 말았다. 제2차 빈 원정에서의 참담한 패배는 오스만 제국과 유럽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유럽인들은 이제 더 이상 오스만 제국을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공포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8세기 중반 산업 혁명을 거치며 유럽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오스만 제국을 월등히 앞서기 시작했다. 프랑스 역시 점차 오스만 제국을 든든한 외부 동맹이라기보다는 식민지 대상으로 삼아야 할 열등한 타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1798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인도로 가는 해상로 확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영토의 영토였던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로써 26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동맹 관계는 급작스레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798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모습
1798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모습

 문명의 충돌로만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쯤에서 우리는 ‘문명의 충돌’이란 역사적 시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용어가 우리의 귀에 익숙해 진 것은 아마도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정치학자 새무얼 헌팅턴이 쓴 ‘문명의 충돌’이란 저서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이 저서에서 “무슬림이 스페인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부터 터키가 빈을 2차 포위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끊임없이 이슬람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슬람은 지금까지 최소한 두 번에 걸쳐 서구의 생존을 위협한 경력이 있는 유일한 문명이다”라고 언급했다.

헌팅턴의 논리대로라면,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대립은 오늘날 우연히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니며, 오랜 과거부터 양 세계는 마치 숙명처럼 끊임없이 충돌해 왔고 미래에도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조금만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의 시각이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이분법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프랑스는 같은 그리스도교 세력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맞서기 위해 이교도 세력인 오스만 제국을 동맹으로 택했다가도 영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렇게 보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한 문명의 충돌이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쟁취하고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초종교적 이합집산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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