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고 아래 쪽방] <중> 벗어날 수 없는 쪽방의 굴레
“여자라고는 나 뿐인데… 찜통 더위ㆍ습기에도 문 열수 없어”
서울 쪽방 거주자 중 14%가 여성… 비좁은 공간서 숨죽여 살아
“여기가 좋겠네. 밤에 자려고 눈 붙일 때가 아니면 워낙 방에 있진 않아요.”
박경자(가명ㆍ65)씨는 굳이 볕이 바짝 드는 골목길을 택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방이나, 인근 카페로 향할 참이었다. 방에서는 늘 숨어 사는 사람처럼 ‘없는 듯’ 지내서 실내가 답답하다는 그는 연신 길 한 편에서 볕을 쬐자고 했다. 함께 쪼그려 앉았다.
“여자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술 먹고 맨몸으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앉자마자 박씨는 안 그래도 비좁은 쪽방에서 더 숨죽여 살아야 했던 이유, 그래서 남들은 아늑하게 여기는 실내를 기피하는 이유부터 털어놨다. 4.13㎡(1.25평) 수준에 그치는 방이 비좁다는 건 오히려 문제도 아니었다. 화장실은 허름한 건물 공용 화장실 한 곳을 모든 거주자가 함께 이용하고, 그나마도 만취한 이웃 차지이며, 잠금장치도 허술한 방에서 공포에 떨다, 열기로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도 방이 습기로 그득하도록 문을 열 수조차 없었던 삶에 비하면. 그가 말하는 여성 쪽방 거주자의 매일은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가 3년 전까지 살았던 서울 동대문구의 쪽방은 3층짜리 건물에 있었다. 밤이면 건물 전체 10여칸의 방에 세입자들이 빽빽하게 몸을 뉘었고, 그들 중 여성은 박씨 혼자였다. 노숙을 피했다는 안심도 잠시, 세수나 샤워는 고사하고 건물 전체에 하나뿐인 공용 화장실을 쓰는 것조차 녹록하지 않았다. 그의 이웃들은 일용직 노동에 지쳤거나, 그 일자리를 얻는 것마저 실패했거나, 일자리를 구할 의지나 기력마저 상실해 대개 술에 취한 상태였다. 이런 그들이 거의 알몸 상태로 화장실을 누비곤 했다.
“술에 취하기도 했고, 여름엔 워낙 더운데 꽉 막힌 방에서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있거나 말거나 그러고 다녔어요. 한 사람이 (화장실에) 가고 나면, 또 한 사람이 그러고. 방 문도 열고 살고. 도저히 (건물에) 못 있겠더라고. 낮에는 무조건 나와 지내고 밤에는 문 꼭 잠그고 살았죠.”
더운 여름이면 지붕 아래에서 밤을 난다는 게 오히려 고역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웃들이) 여자가 산다는 걸 아니까 도저히 창문을 열어 놓을 수 없더라고요. 오죽했으면 밤새 방에 습기가 가득 차 공원에 나와 바람을 쐬기도 하고. 잔다기 보다 그냥 시간을 보내는 거죠.”
이렇게 겨우 노숙만 면한 벼랑 끝의 주거빈민이 되리라는 것은, 박씨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식모 일을 시작으로 쉼 없이 달려온 노동의 결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니 당연했다. 그는 “친정아버지가 재산을 다 팔아 바람을 피우고 학교도 안 보내주고 해서, 아홉 살 때부터 시골에서 남의 집 식모 일을 했다”며 “애 봐 주고, 밥하고, 물이 안 나오면 몇십 리를 가 물통을 이고 지고 오며 그렇게 살아 이 나이를 먹었다”고 했다.
그런 고역 속에 만든 아홉 살 소녀의 월급은 고스란히 친정으로 전달됐다. ‘이건 아니다 싶어’ 서울로 향한 때가 스물다섯 무렵. 카센터의 식당에서 밥을 하며 월급을 차곡차곡 모으고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남편도 만났다. 가정을 이루고선 남매가 장성할 때까지 애면글면 없는 살림을 꾸려 왔다. 황혼 이혼을 결심한 건 평생 지속돼 온 시부모의 폭행이 도를 넘기 시작했을 무렵인 5년 전.
“학교도 제대로 안 나오고 하다 보니 저를 처음부터 무시했어요. 남편은 그런데도 본체만체 하고요. 머리채도 잡고, 살림을 다 부수기도 하고. 어느 날 야간근무 마치고 아들이 집에 와서 제가 맞은 걸 보더니 ‘엄마 이만큼 해서 우리 키웠으니까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 이혼해 버려.’ 하더라고요. 그 길로 위자료 한 푼 안 받고 이혼 서류 보내고 집을 나왔어요.”
친한 언니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없는 돈을 긁어 모아 식당도 해 봤지만, 지칠 대로 지친 탓인지 상황은 악화됐다. 식당이 문을 닫고, 병원비를 충당하느라 빈손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수개월이었다. ‘아빠가 보기 싫다’라며 각자 지방으로 흩어진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망설인 것이, 연락이 완전히 끊긴 지금껏 이어졌다.
“철거를 앞둔 빈 고시원에서 노숙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거기서 같이 몇 달간 노숙을 했어요. 잔다기보다 밤에 그냥 시간만 보내는 거죠. 방에 버리고 간 이불도 있고 하더라고요. 밥은 교회, 절 이런 데서 무료급식 주는 걸 먹고. 거기서 만난 분이 쪽방의 존재를 알려줘 여기까지 온 거죠.”
박씨는 2년 전, 조금은 나은 방을 찾아 용산구의 다른 쪽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나마 이사 후 길가로 창문이 난 방에 살게 됐다는 것이 그가 최근 누리는 유일한 기쁨. 그런데도 건너편에 내려다 보이는 공원 한 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화장실이 제일 가까운데 그래도 그쪽으로는 절대 안 가요. 아무래도 여자가 눈에 띄면 사람들이 험하게 나와서요. 지난번엔 가만히 있는 저한테 ‘○○○을 확 파 버린다’고 하더군요.”
어떤 삶을 희망하냐는 질문에 그는 사치라는 듯 “남은 생이 길어 봐야 5년이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애들이 보고 싶긴 한데, 절대 연락할 마음은 없다”라며 “그냥 아무 일 없이 5년 안에 갔으면 좋겠다”고 연신 희망고문을 거부했다. 박씨처럼 더 많은 위험, 고통, 폭력에 노출된 쪽방 여성 거주자는 서울 지역에서 441명(2018년 9월 기준)으로 서울 전체 쪽방 거주자의 13.7% 수준이다.
박승민 동자동사랑방 활동가는 “쪽방 주민 상당수가 빈곤의 극한 속에서 몸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데다 주거 환경이 지나칠 정도로 열악하다 보니 무기력증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라며 “이들을 위한 이주 대책 등 실질적 대책을 고민하는 한편, 그 안에서도 특히 사각지대에 놓여 고생하는 여성 노인 거주자의 어려움을 파악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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