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 시대’에 있었던 정치언어가 다시 소환됐다. 바로 ‘영수회담(領袖會談)’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과 1대1로 만나는 영수회담을 고집하면서다. 청와대가 이를 일부 받아들였지만, 황 대표는 또다시 이를 거부하고 회동 참여 정당을 제한해 역제안을 했다. 현재로서는 막힌 정국이 대통령과 여야 정당 대표들과 회담에서 풀릴 수 있을지 오리무중이다.
◇황교안이 소환한 ‘3김시대’ 영수회담
영수회담은 다소 유통 기한이 지난 정치언어다. 여야의 거대 양당 만이 존재했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 대통령과 야당 총재(지금의 당 대표)가 만나 여러 정치 현안의 담판을 짓는 자리였다. 야당을 총재라는 ‘1인 보스’가 좌지우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영수(領袖)는 한자로 옷깃과 소매를 뜻한다. 예로부터 당파나 무리의 우두머리가 만나면 예의를 차리려 옷깃을 여미고 소매를 걷은 뒤 악수를 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니 영수회담이라는 단어는 국가의 최고 지도자이자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여권의 수장 정도로 격하하는 성격도 있다. 반면, 대통령과 마주하는 이는 지위가 격상되는 효과를 누린다는 얘기가 된다.
황 대표가 청와대에 잇따라 요구해온 문 대통령과의 1대1 회담은 바로 과거의 영수회담을 하자는 얘기다.
청와대가 4일 황 대표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여야 5당 대표들과 집단 회동을 한 뒤 1대1 회담을 하자고 했지만, 황 대표는 다시 거부했다. 집단 회동에 비교섭단체인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은 빼자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협치의 상징적인 기구로 천명한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의 정신에 반하는 주장이기 때문에 이는 청와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지노선이다. 과거 한국당의 이 같은 주장을 청와대가 꾸준히 반대해왔기 때문에 황 대표의 이 같은 주장에는 판을 깨자는 저의가 담겨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황 대표가 문 대통령과 얼굴을 맞대고 국회 정상화의 물꼬를 트려는 의지가 과연 있는지 의심된다.
◇황교안, 3김시대 보스정치 꿈꾸나
황 대표의 속내는 무엇일까. 굳이 다른 야당들을 제치고 영수회담을 요구하는 이유는 회담의 효과보다 회담 자체로 누릴 수 있는 정치적인 위상을 계산한 것으로 해석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처럼 대통령에 맞서는 강력한 야당 지도자의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통령급 대표’라는 이미지다. 다른 야당들의 지위와 자신은 다르다는 차별성도 부각 시킬 수 있다.
청와대의 절충안을 또다시 거부하고 역제안을 한 모양새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들 간의 회담 얘기는 지난달 9일 문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맞아 했던 대담에서 나왔다. 당시 문 대통령은 북한에 인도적 식량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함께 모여 협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황 대표는 회담의 주제에 이견을 밝히며 집단 회동이 아닌 1대1 회담을 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난색을 표하던 청와대가 수정 제안을 했는데도 황 대표는 또다시 이를 거부하고 다른 제안을 한 것이다.
자신의 요구를 청와대가 수용하도록 해 정국 주도권을 쥐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닐까.
◇협상 포기하면 무얼 할 건가
황 대표의 이런 행보를 두고 한국당 사정에 밝은 정치 전문가들도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 중에서도 장성철 공감과논쟁정책센터 소장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당 대표는 결정이 아닌 결단을 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장 소장은 “때로는 불리한 제안이라도 받아들여 협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게 정치이고 당 대표의 역할“이라며 “황 대표가 아직 정치인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풀이했다. 더구나 청와대는 황 대표의 제안을 일부 받아들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황 대표는 그것마저 걷어찼다. 지금까지 장관, 총리로서 결정하는 자리에만 있었던 황 대표의 약점이 드러난 셈이다.
문 대통령을 향해 ‘좌파독재’를 부르짖어온 황 대표가, 청와대의 한발 물러선 제안에도 변화하는 기색을 비치지 않는다면 ‘국정운영의 발목만 잡는 대안 없는 야당’ 프레임을 뒤집어 쓸 우려도 있다. 같은 진영이자 전임 대표인 홍준표 전 대표조차 최근 ‘좌파독재’ 공세를 두고 “사실 독재정권은 우파 쪽에서 했지 않느냐”며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얘기다.
정치는 대화와 협상으로 이상과 실리 사이에 적절한 선을 찾는 과정이다. 대화도, 협상도 않겠다는 건 정치를 포기한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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