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또다른 화약고, 카슈미르를 가다] <상> 무장투쟁 진원지, 남부에서 무슨 일이 상>
힌두교 국가인 인도 통치에 반발… 군경 폭력에 분노한 청년들 반군 가담
소년들, 반군 탈출 도우려 돌멩이 시위… 미중 이해관계 얽혀 분쟁해결 요원
※편집자주: 남아시아의 두 앙숙, 인도와 파키스탄 접경지 카슈미르에서는 군사적 충돌을 포함, 수십년간 양국의 갈등이 지속돼 왔다. 하지만 인도령 카슈미르 내에서도 대다수가 무슬림인 주민들은 힌두교 국가인 인도 정부의 통치에 반발, 분리독립 또는 자치 확대를 요구하며 싸움을 벌이고 있다. 게다가 최근 중국이 남아시아 진출을 꾀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 봉쇄를 위한 ‘인도ㆍ태평양 정책’ 일환으로 인도를 노골적으로 편들면서 분쟁의 스펙트럼도 넓어지고 있다. 미중 갈등의 또 다른 화약고가 될지도 모를 카슈미르의 긴박한 정세를 3회 시리즈로 정리한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인도 최북단 잠무-카슈미르주(州)의 ‘여름수도’인 스리나가르 구(舊) 시가지에 위치한 자미아 마스지드(Jamia Masjid). 카슈미르 최대 이슬람사원인 이 곳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라마단 금식월 세 번째 금요일인 이날, 인도 보안군은 사원 주변을 봉쇄하고 금요기도회를 금지했다. 한 주 전의 금요일(5월 17일)에 이은 2주 연속 금지 조치였다. 잠무-카슈미르주 주둔 병력만 60만~70만명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무장 군인 및 경찰이 각 골목마다 배치된 거리 풍경은 ‘지구상 가장 군사화한 지역’임을 실감케 했다. 여기저기서 만난 주민들은 자신의 일상을 파고든 “점령 세력”(현지 주민들의 표현) 인도에 한결같이 치를 떨었다. 기자를 붙잡고 카슈미르 역사를 읊어 주던 60대 노인은 결국 이렇게 외쳤다. “저들도 우리를 싫어하고, 우리도 저 군인들이 꼴 보기 싫어 죽겠어.”
시내 상점도 모두 셔터를 내렸다. 알카에다 연계 조직으로 알려진 무장반군 ‘안사르 가즈와툴 힌드(AGH)’를 이끌었던 무사 자키르가 전날 남부 풀와마 지구의 트랄에서 인도군과 교전 중 사망한 것과 관련, 주민들이 ‘셧다운’으로 분노를 표한 것이다. 사실 ‘알카에다’라는 브랜드는 카슈미르 분쟁의 정치적 본질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자키르가 알카에다 이념을 위해 싸웠다고 보는 사람은 좀체 없다. 무장투쟁 1세대 중년은 물론, 기자나 호텔 매니저, 서점 주인, 학자,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 등 누구에게 물어봐도 2016년 이래 급부상 중인 ‘2세대 무장투쟁’에 대해선 같은 목소리를 냈다. 주류 정치에 희망을 잃고 인도군의 폭력에 분노한 청년들이 “강요된 길을 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인도를 향한 이 같은 적개심이 가장 부글거리는 2세대 무장투쟁의 진원지, 카슈미르 남부 지역을 향해 지난달 28일 출발했다.
◇“무장투쟁 2세대, 강요된 길 걷는다”
스리나가르와 카슈미르 남부를 잇는 ‘잠무-스리나가르 고속도로’ 위에선 잊을 만하면 방아쇠에 손을 얹는 ‘날 선 표정’의 군인들 모습이 포착됐다. 대형 군용차량이 수시로 이동했고 그때마다 군은 다른 차량 모두를 멀찌감치 정지시켜 군 차량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했다. 동행한 카슈미르 기자 자비드(가명)는 지난 2월 이슬람 무장단체 ‘자이시 에 무함마드(JeM)’의 자살 테러로 보안군 42명이 숨졌던 이른바 ‘풀와마 공격’ 이후에 새로 나타난 조치라고 설명했다.
트랄 지역 누르포라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도 어김없이 보안군은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이에 응대라도 하듯, 자키르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 안팎에는 AK-47 소총을 든 자키르의 사진과 그의 조직 AGH의 깃발이 버젓이 내걸려 있었다. 그의 부친 압둘라 라시드 바트는 “가장 용감한 아들이었다.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라시드에 따르면 2010년 당시 14세 소년이었던 자키르는 돌멩이 시위 무리에 있다가 잡혀간 적이 있다. 그때 경찰서 안에서 흠씬 얻어맞은 게 ‘전환점’이 됐다고 한다. 영민했던 자키르는 그 이후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찬디가르 대학에 다니는 공학도가 됐음에도 학업에는 관심을 끊었다. 2013년 카슈미르 최대 무장단체인 ‘히즈볼 무자히딘’에 가입하면서 그는 전혀 다른 인생을 걷게 됐다.
“군경의 구타와 고문이 전환점이 됐다”는 말을 기자는 이번 현지 취재기간 중 밥 먹듯이 들었다. 카슈미르 주민들을 향해 퍼붓는 인도군의 일상적 모욕과 심각한 인권 침해는 무장단체 입장에선 최고의 ‘신병 모집 수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무장단체 대원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 경우, 보안군은 그들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고문했다. 그렇게 불려 다닌 가족들도 결국 ‘정글’로 떠났다. 아난트나그 지구의 와가마 마을 주민 카티불라 다스(30)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카티불라가 무장단체 ‘잠무-카슈미르 이슬람국가(ISJK)’에 가입한 건 4개월 전이다. 수니파 급진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카슈미르 지부를 자처하는 이 조직은 카티불라의 아내 야스미나 아크타르(30)의 오빠인 ‘마게시 밀’이라는 인물이 만들었고, 대원은 고작 5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원래 이들 부부의 집안 양쪽엔 무장반군 활동을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일용직 목수 남편 카티불라와 살던 아내 야스미나가 원했던 건 그저 ‘평범하게 사는 삶’이었다.
그러나 특수작전그룹(SOG)과 인도 군이 합동 운영하는 ‘SOG+군’ 캠프로 수 차례 끌려 가면서 그의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 났다. SOG는 잠무-카슈미르주 경찰 산하에서 대(對)반군 작전을 수행하는 ‘엘리트 부대’로 통하지만, 사실상 비정규직 용병이나 다름없다. 성과에 혈안이 돼 있는 SOG는 주민들 사이에선 인권 침해의 대명사로 거론된다. 수시로 행해지는 심야 급습 작전으로 붙잡힌 사람들은 우선 ‘SOG+군’ 캠프에 구금되는데, 현지에서 이 곳은 “고문 센터”로 불린다. 야스미나에 따르면 남편 카타불라는 여기서 “너는 무장반군 동조자”라는 고함을 듣고, 구타와 고문에 시달린 것은 물론, 스파이 노릇까지 강요받았다고 한다. 고혈압을 앓던 카티불라는 과거에 받았던 고문의 후유증까지 겹쳐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기도 했다. “남편이 평범하게 살기 어렵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지만, 세 아이를 뒤로 하고 반군에 가담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품 속으로 파고드는 막내아이를 보듬으면서 야스미나는 이같이 말했다.
◇군 진입 땐 돌멩이 시위… 반군 탈출 지원
같은 날 오후 2시 아난트나그에서 쿨감 지구로 향하는 길, ‘아난트나그에서 교전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행한 기자 자비드는 곧 돌멩이 시위가 시작될 수 있다면서 “도로가 봉쇄되기 전에 서둘러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슈미르 교전 현장은 최근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무장반군의 위치 정보를 입수한 보안군이 해당 지역을 봉쇄하고 작전에 들어갈 즈음이면 동네 소년들과 청년들이 쏟아져 나와 돌멩이 시위로 군의 진입을 막아 선다는 얘기다. 군의 진입 속도를 늦추고 반군의 탈출을 돕기 위해서다. 예컨대 지난달 29일 쿨감 지구에서 수행된 대반군 작전 때 군이 끝내 반군을 찾지 못해 발길을 돌린 것도 격렬한 돌멩이 시위 덕분이었다.
쿨감 지구에 도착해 람푸르 마을 주민 샤나자 바누(45)의 집으로 들어섰다. 바누는 남편과 두 번이나 사별한 ‘전쟁 미망인’이다. 무장단체에 가입한 첫 남편 이브라힘 셰이크를 1997년에 잃었고, 첫 남편의 동생이자 둘째 남편인 마흐무드 아슈라프 역시 무장반군 활동 중이던 2009년 사망했다. 바누의 큰아들 살만 이브라힘(17)마저 현재 잠무 감옥에 수감돼 있다. 앞서 살만은 지난해 돌멩이 시위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다. 바누는 경찰서를 찾아가 “아들은 돌멩이 하나 던진 적이 없다”고 호소했다. 그때 돌아온 경찰의 대답을 바누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당신 아들이 돌멩이 하나 던진 적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두 아버지가 모두 무장반군이었으니 아이도 (나중에) 무장반군이 될 것 아닌가?”
어쨌든 이런 모욕적 말을 뒤로하고 아들 살만은 일단 풀려났다. 그러나 지난 3월 7일 한밤 중에 갑자기,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병력’으로 들이닥친 SOG와 군 합동팀에 의해 끌려갔다. 미성년자인 그는 ‘SOG+군’ 캠프에 42일간 갇힌 뒤, 아난트나그 감옥을 거쳐 지난달 2일 잠무 감옥으로 이송됐다. 아난트나그 감옥에서 살만을 잠시 면회했던 그의 삼촌은 “조카가 구타로 피를 많이 흘렸었다”고 전했다. 살만에게는 공공안전법(Public Safety Act) 위반죄가 적용됐다. PSA를 어길 경우, 누구든지 구체적 혐의가 없어도 6개월간 구금될 수 있다.
오후 3시19분 ‘돌멩이 시위가 시작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마지막 취재지인 소피안 지구를 향해 서둘러 출발했다. 쿨감에서 소피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벨리바그 지역에는 사과 과수원을 점령한 ‘라슈트리아 라이플즈 62 사단(RR)’ 대형 캠프가 들어서 있다. RR은 인도군 소속 대반군 작전부대로 카슈미르에 주둔 중이다. 이들의 대형 군 캠프 옆을 지나는 차량은 다음 두 가지 규율을 엄수해야 한다. 첫째, 창문을 닫고 운전할 것. 둘째, 시속 10㎞ 미만 속도로 달릴 것. 다행히도 검문소 군인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던 기자에겐 말을 건네지 않았다.
◇무장단체 대원 배출 없는 가족은 없어
한 시간 정도가 지난 오후 4시30분, 소피안 지구 물루 치트라감 마을에 닿았다. 취재진을 맞이한 아나이아트 샤밈(25)은 현재 이 마을에 사는 총 190개 가구 가운데 무장단체 대원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않은 집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아나이아트 가족의 스토리는 그 자체가 이 마을 무장반군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의 부친인 샤밈은 1989년 국경통제선(LoC)을 넘어가 파키스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1992년 인도령으로 되돌아와 싸움을 벌인, 말하자면 ‘무장투쟁 1세대’다. 1994년 1월 4일 숨진 아버지의 대를 이은 건 아나이아트의 남동생 타리크 샤밈(23)이다. 당초 이슬람학자의 길을 걷던 타리크는 군경에 서너 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하자 마음을 바꿨다. 결국 지난해 3월30일 히즈볼 무자히딘에 몸을 담게 됐고, 올해 5월3일 교전 중 목숨을 잃었다. 아나이아트의 사촌 5명도 무장단체 활동 중 사망했다.
이런 집안 출신인 아나이아트를 보안군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그 역시 수 차례 불려갔고, 끊임없이 ‘스파이 노릇을 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매번 거절했고, 그때마다 구타를 견뎌야 했다. ‘무장반군에 가입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자 웃음과 함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물루 치트라감 마을은 한때 무장반군들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곳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소한 이 마을 출신 반군이 이따금 가족들을 방문할 상황은 됐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불가능한 얘기다. 2016년 새로운 군 캠프 7곳이 더 들어서는 바람에, 기존의 3, 4곳을 더하면 현재 이 지역에만 군 캠프가 10여곳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경비가 매우 삼엄해졌다.
하지만 군 캠프가 늘어났다고 해서 무장반군이 줄어드는 추세는 아닌 듯하다. 익명을 신신당부한 카슈미르 남부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달 초 라마단이 시작된 이래 보름 동안 남부 지역에서 ‘사라진’ 청년들은 무려 50여명에 달한다. 트랄 지구와 쿨감 지구가 각각 12명씩이며, 소피안 지구와 풀와마 지구는 각각 8~10명씩, 그리고 아난트나그의 경우 5, 6명 정도다. 자취를 감춘 젊은이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교전 현장에 나타날지, 그 시점은 언제쯤일지, 아니면 소셜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파하는 무장반군의 모습으로 등장할지는 알 수 없다. 그날 오후 5시24분, 아난트나그 교전 현장에서 사망한 반군 두 명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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