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만덕사의 새 주지 아암 혜장
◇취해 살다가 꿈 속에 죽는 인생
제자 황상의 5촌 당숙인 황인태는 다산보다 나이가 16세나 위였다. 다산은 그와 허물없이 왕래했다. 1805년 당시 61세였던 황인태는 성현의 책에 마음을 쏟아 잠심하던 때도 있었지만 갈수록 중인 신분의 제약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루는 그가 사의재로 다산을 찾아와 말했다. “살다 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남은 인생 취중에 살다가 꿈속에 죽을 뿐이지요. 거처 이름을 취몽재(醉夢齋)라고 할랍니다. 글 하나 지어주십시오.”
다산의 성정에 그 말이 탐탁할 리 없다. 며칠 뒤 다산은 사의재를 다시 찾은 황인태에게 자신이 지은 ‘취몽재기’를 건넸다. 긴 글을 간추리면 내용이 이랬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에게 취했다고 하면 안 취했다고 펄쩍 뛴다. 코를 골며 잠꼬대하다 웃는 것은 꿈속에서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값비싼 물건을 얻어서이다. 그는 잠 깨기 전에는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이 위독한 사람은 제 병을 모르고, 스스로 자기가 병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병이 심하지 않다. 결국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고는 다시 “무릇 스스로 본 것을 돌이켜 살펴, 깨어있다거나 깨달았다, 또는 깨쳤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깊이 취하고 곤히 잠들었다는 증거다. 능히 스스로 취해 꿈꾼다고 말하는 자라야 혹 술에서 깨고 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적었다.
글 끝에 다산은 “내가 취몽(醉夢)에 대해 주장이 있는지라 마침내 이를 써서 그에게 준다”고 썼다. 무슨 주장이었을까. 흥미롭게도 그것은 천주교 교리서인 ‘칠극(七克)’의 한 대목에서 끌어온 내용이었다. ‘칠극’ 권 1 ‘극오난(克傲難)’은 서두가 이렇다. “꿈인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미 깨어난 상태다. 악인 줄 아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선으로 옮겨간다. 처음 병을 치료할 때는 모름지기 병이 있는 줄을 안다. 만약 병을 인지하지 못해서 치료하지 않으면 치료하기가 어렵다.”
취몽재 황인태는 자신이 취한 줄을 알고, 꿈꾸고 있는 줄을 안다. 그러니까 그는 술에서 깨고 꿈에서 깨어날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황인태의 푸념을 듣고, 다산은 넌지시 ‘칠극’의 한 단락을 끌어와 그에게 취몽의 삶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덕담을 건넸다. 이것을 암묵적 포교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다산은 배교를 선언하고 쫓겨온 귀양지 강진에서도 의식의 밑자락에 여전히 천주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었다.
◇만덕사의 새 주지
강진 만덕사(萬德寺)는 비록 퇴락했어도, 고려 때 백련결사(白蓮結社)의 찬연한 전통이 빛나는 절이었다. 큰 절 대둔사에서 새로 부임해 온 혜장(惠藏ㆍ1772-1811)이라는 새 주지가 다산을 한번 꼭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소문에 그는 대단한 학승(學僧)으로, 나이 서른에 이미 대둔사의 강회에서 주맹(主盟)을 맡아 100명이 넘는 승려를 앉혀 놓고 강의해 단숨에 그들을 압도했다는 풍문이었다. ‘주역’에 대한 조예마저 깊어, 한다 하는 선비들도 그의 앞에 서면 입도 떼지 못하고 달아나기 바쁘다고 했다. 당시 혜장은 고작 서른네 살이었다.
다산은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황상을 불렀다. “산석아! 네가 한번 만덕사를 다녀와야겠다. 그 절 새 주지가 거기서 제자들을 가르친다더구나. 네가 가서 슬쩍 배움을 청해,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펴보고 오너라.” 역시 다산답다. 불쑥 찾아가지 않고, 제자 황상을 먼저 보내 그의 근량을 달아보게 했다. 황상 후손가에서 보관해온 ‘치원소고(巵園小藁)’ 중 ‘여철선선사서(與鐵船禪師書)’에 이 내용이 나온다.
황상이 스승 앞에 결과를 보고했다. 황상은 과연 풍문대로 거침없는 큰 학문을 보았노라며 아득히 압도된 표정을 지었다. 다산은 그가 더 궁금해졌다. 다산은 1811년 혜장이 죽은 뒤에 지은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에 이때 일을 기록해두었다. “1805년 봄에 아암이 와서 백련사(白蓮社)에서 묵으며 애타게 나를 보고자 했다. 하루는 내가 야로(野老)를 따라서 자취를 감추고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그와 함께 반나절 동안 얘기했지만 그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이날은 1805년 4월 17일이었다. 이날 다산과 동행한 야로가 바로 황인태였다. ‘황씨체화집’에 수록된 황인태의 시 중에 ‘4월 17일, 탁옹과 함께 백련사로 놀러 가 혜장상인을 방문하다(四月十七日 사월십칠일, 同籜翁游白蓮社 동탁옹유백련사, 訪惠藏上人 방혜장상인)’란 시가 있다. 같은 날 다산도 ‘4월 17일 백련사로 놀러가다(四月十七日, 游白蓮社 유백련사)’와 ‘혜장상인에게 주다(贈惠藏上人 증혜장상인)’란 시를 남겼다. 특히 두 번째 시는 황인태의 시와 운자가 똑같다.
◇생룡활호의 기상
혜장을 찾아간 다산은 짐짓 시치미를 뚝 떼고서 황인태의 그늘에 앉아 딴청을 부렸다. 그 바람에 혜장은 다산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혜장의 거침없는 논변과 기상이 좌중을 완전히 압도했다. 당시 혜장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황인태의 시에 잘 드러난다. 가운데 부분만 추려 읽는다.
문득 들으니 여산의 스님 (忽聞廬山釋 홀문려산석)
다시금 동국에 나셨다 하네. (復此生東國 복차생동국)
젊은 나이 명성이 아득히 높아 (妙齡藹聲譽 묘령애성예)
불문에서 기색이 대단하다지. (空門多氣色 공문다기색)
불경은 소중히 여기지 않고 (貝葉匪所珍 패엽비소진)
‘주역’에 능통해 잘 안다 하네. (羲繇已通熟 희요이통숙)
내가 그 사람을 만나보려고 (我欲觀其人 아욕관기인)
마침내 백련사 북쪽 찾았지. (遂至蓮寺北 수지련사북)
말 듣자 황하 제방 터진 것 같아 (聽言若決河 청언약결하)
내 가슴을 시원히 씻어주누나. (令我洗胸臆 영아세흉억)
말기운 조금의 거침이 없어 (辭氣頗疎放 사기파소방)
진솔함 그 누가 맞겨루리오. (任眞誰相逼 임진수상핍)
시의 내용을 풀면 이렇다. 예전 소동파가 귀양지에서 만났던 혜원(慧遠) 같은 걸출한 승려가 동국에 출현했다는 소문이 인근에 쫙 퍼졌다. 그 당사자인 혜장은 불경뿐 아니라 ‘주역’에도 능통해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직접 만나보려고 찾아가서 그의 말을 들었다. 현하의 열변은 마치 둑 터진 황하의 물결처럼 거침이 없고, 말의 기운도 거리낌이 없어서, 듣는 사람이 속이 후련하고, 사람됨 또한 꾸밈이나 허세 없이 진솔했다. 이것이 황인태가 자신보다 27세나 어린 혜장에 대한 솔직한 평가였다.
다산도 ‘혜장상인에게 주다(贈惠藏上人)’라는 시에서 “서른에 일천 사람 스승이 되니, 어이 하늘 날아가는 새가 아니랴. 가파른 길 한 차례 만나보려고, 넝쿨 잡고 가시덤불 헤쳐 왔다네. 바라건대 그대여 겸손 익히소. ‘주역’에다 어이해 힘을 쏟는가? (三十師千人 삼십사천인, 豈非戾天翼 기비려천익. 崎嶇爲一顧 기구위일고, 捫蘿爲披棘 문라위피극. 願汝流謙光 원여류겸광, 推移詎費力 추이거비력)”라고 했다. 앞서 황인태의 시가 젊은 혜장의 기염에 놀라 입을 딱 벌린 형국이라면, 다산은 ‘겸광(謙光)’ 즉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되 그 자체로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지, 어이하여 승려가 ‘주역’ 공부에 이다지 힘을 쏟느냐고 은근히 누르는 뜻을 비쳤다.
하지만 다산도 혜장의 도저한 학문에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생룡활호(生龍活虎)처럼 제 기운을 억제하지 못하고 펄펄 뛰었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로 좌중을 쥐었다 놓았다 했다. 다산은 자리 속에 섞여 앉아 그의 말만 듣다가 슬그머니 물러 나왔다.
◇어찌 이렇듯 속이십니까?
다산이 떠나고 난 뒤 좀 전에 다녀간 사람이 다산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혜장은 그 길로 산문을 나서 내달았다. 저만치 가던 다산의 앞을 팔 벌려 가로막아 선 혜장이 말했다. “밤낮으로 공을 사모했는데, 제게 어찌 이리 하십니까?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시다니요.” 다산이 웃었다. “이대로는 못 가십니다. 하루 묵어 가셔야지요.” 다산은 혜장에게 붙들려서 다시 승방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둘 사이에 ‘주역’을 두고 본격적인 일전이 벌어졌다. 다산이 물으면 혜장이 대답했다. 잠시의 망설임이 없었다. 혜장은 재를 깐 회반(灰盤)을 가져오게 해서 낙서(洛書) 구궁(九宮)을 그리며 거침없는 설명을 이어갔다. 저만치에서 제 스승의 사자후를 지켜보던 승려들 중에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다산은 묻기만 하고 좀체 제 말은 하지 않았다. 혜장은 자신의 말이 거듭될수록 그 점이 께름칙했다. 한껏 휘두른 칼날이 허공만 가르고 있었다. 혜장은 자꾸 불안하고 불편했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두 사람은 잠들지 못했다. “혜장! 주무시는가?” 다산이 스르렁 칼집을 풀었다. “아닙니다.” “내 하나 물어봄세. 건괘(乾卦)는 어째서 초구(初九)라 했을까?” “그야 구(九)가 양수(陽數) 중 가장 크기 때문이지요.” “음수(陰數)는 어디서 끝나지?” “십(十)입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곤괘(坤卦)는 어째서 초십(初十)이라 하지 않고 초육(初六)이라 했을까?”
다산이 불쑥 던진 한마디가 무수한 검광(劍光)이 되어 일제히 혜장을 향해 무찔러 들어왔다. 혜장은 이 질문을 받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혜장이 다산 앞에 무릎을 딱 꿇었다. “산승의 20년 ‘주역’ 공부가 한낱 물거품이올시다. 왜 그렇습니까? 깨우쳐 주십시오.” 다산이 천연스레 받았다. “나도 잘 모르겠네. 기수(奇數)가 되려면 끝 숫자가 4나 2가 되어야 하지. 하지만 2와 4는 모두 우수(偶數)가 아닌가?” 혜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멍하게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우물 안 개구리와 초파리는 잘난 척할 수가 없는 것을! 선생님, 마저 가르쳐 주십시오.”
이 문답의 깊은 속내를 필자는 가늠할 수가 없다. 범처럼 포효하던 혜장은 다산의 일격에 강아지처럼 고분고분해졌다. 다산은 기고만장하던 혜장의 기염을 짧은 질문 하나로 격파하고 통과해 버렸다. 이후 혜장은 기운을 누그러뜨려 겸손해지겠다며 제 호를 아암(兒菴)으로 고쳤다. 그리고는 다산 앞에서 고분고분한 아이가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를 찾았다. 이날 이후 다산의 시문집은 온통 혜장에게 주는 시로 도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유배지의 다산은 학문적 대화가 가능한 첫 상대를 비로소 만났다. 누구에게도 꺾인 적 없던 혜장도 다산을 만난 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자각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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