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마이너리티 <38> 색각이상자]
※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한두 가지 측면에서는 소수자입니다. 자신의 불편은 크게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수자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인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국일보> 는 격주 화요일 한국 사회에서 유독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한국일보>
“모니터에 구현된 색깔을 검증할 때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닌데도 색각이상이란 이유로 업무에 부적합한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울 소재 한 정보기술(IT) 기업 소프트웨어(SW) 엔지니어인 박정규(38)씨는 소프트웨어를 감리하는 일을 한다. 얼마전 사용자가 시스템제어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편리하게 화면 구성이 돼 있는지를 확인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그는 색각이상이란 이유로 일을 하지 못할 뻔했다. 가령 긴급상황에 사용자가 화면에서 재빨리 대응 버튼을 찾아 누를 수 있도록 해당 버튼이 눈에 잘 띄는 빨간색으로 디자인됐는지를 검증해야 하는데 색각이상이면 색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박씨는 “사실 소프트웨어 설계 검증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상관이 없다”고 설명했다. 화면에 어떤 빛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내보낼 것인지를 정하는 RGB(빨강ㆍ초록ㆍ파랑)값이 해당 소프트웨어에 정확히 설정돼 있는가를 계산하면 되는 일이었다. 결국 병원에서 소견서를 받는 등 색각이상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업무를 했지만 박씨에게는 씁쓸한 경험이다. 그는 “색각이상이라고 하면 색이 안보이냐, 흑백으로만 보이냐 등을 묻는데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다른 점이 없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색각이상에 대해 잘 모른다는 얘기다.
◇어린 시절 놀림감에 위축되는 마음, 장래희망 결정할 때도 고민 커
색각이상은 특정 색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거나 다른 색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과거 색맹, 색약, 색신 등으로 부르던 것을 모두 포함하는 용어다. 이는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망막 안 시세포 중 하나인 원뿔세포에 이상이 있으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예를 들면 세 가지 원뿔세포(적색, 녹색, 청색) 중 녹색 세포가 없으면 흔히 말하는 녹색맹이고, 세포의 기능 이상이 있으면 녹색약이다. 기능 이상 정도에 따라 녹색빛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고, 다른 색과 같이 있는 녹색을 구분해내는 능력도 달라진다.
선천적 색각이상은 전체 남자인구 약 5~8%에서 나타난다. 보건복지부와 김민기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남자의 5.9%, 여자는 0.5%가 색각이상으로 집계됐다. 18세 이상 성인 인구 수로 계산해보면 약 165만명(남성 152만6,231명ㆍ여성 12만9,860명)에 이르는 숫자다.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이유는 색각유전자가 X염색체에 있기 때문이다. 남성(XY)의 경우 부모 중 한쪽에서 이상이 있는 색각유전자를 받으면 색각이상 증상이 나타나는 반면 여성(XX)은 양쪽 모두 색각이상이 있는 유전자를 받는 경우에만 색각이상자가 된다.
김대희 김안과병원 안과전문의는 “색각이상은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질환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색을 보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모든 사람이 냄새도 다르게 느끼는 것처럼 박씨와 같이 대부분의 색각이상자들은 빛을 느끼는 감각이 나머지 92~95% 사람들과는 다른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흑백으로만 보일 정도로 심한 경우(전색맹)도 있지만 극히 드물고(약 0.005%) 이런 경우는 시력도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가 색각이상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다 보니 무심코 던진 말들은 색각이상자들에게는 상처가 된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눈X신’이란 놀림을 받거나 이 물건 저 물건을 들이밀며 색을 맞춰보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인 이우진(20)씨는 “옷 가게에서 옷을 볼 때나 지나가는 차를 볼 때, 남들과 다르게 색을 말하면 놀림을 받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굳이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아 가능하면 자신의 색각이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씨는 “입영 신체검사를 받을 때 보니 색약은 공군은 지원하지 못했고, 해군은 지원 가능했지만 특정 병과는 갈 수 없게 돼있었다”며 “육군은 지원할 수 있는데 특정 군에는 지원 자격조차 없다는 게 억울했다”고 말했다.
색각이상자들이 모인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초등학생, 중학생 아들의 색각이상을 발견한 후 걱정이 많아진 엄마들의 글이 종종 올라온다. ‘미술 학원을 보내도 될까’ ‘공학 계통 등의 직업을 꿈꾸다가 접은 자녀를 보면 안타깝다’ 등 진로 선택에 제약을 느끼고 속상해 하는 내용들이 많다. 대학입학 조건으로 색각이상 여부를 따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사회적 편견을 경험하다 보면 스스로 진로에 한계를 짓기 십상이다.
◇인권위 세 차례 권고에도 경찰 “색각이상 채용 불가”
편견이 실제 차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 채용 과정에서 색각이상 여부를 따지는 일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곳들이 있다. 경찰과 군이 색각이상과 관련해 채용 기준을 유지하고 있고, 민간에서도 항공 분야나 일부 디자인, 제약 관련 업체들이 구직자의 색각이상 여부를 본다. 색각이상자들은 항공 분야 등 특수한 경우에 이상여부를 따지는 건 이해하지만, 실제 업무능력과도 관계 없이 편견에 사로잡혀 채용 시 차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의웅(58)씨는 “대학 시절 학군사관후보생(ROTC) 시험을 봤는데 색각이상으로 떨어졌다”며 “당시 일반 현역 육군으로 못 가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기준을 둔게 이해가 안됐다”고 말했다. 세월이 달라졌다고 해도 이씨는 여전히 불합리한 기준이 없는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색각이상자 채용 기준과 관련해 논란이 많은 대표적 사례가 경찰이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약도(약한 정도) 이외 색각이상자를 채용하지 않는 경찰에 ‘차별개선 권고문’을 보냈지만 불수용 답변이 돌아왔다. 세 번째 거절이었다. 경찰청의 ‘경찰공무원 채용 시험 신체검사 기준표’에 따르면 중도ㆍ강도 색각이상자는 경찰공무원 채용이 제한된다. 경찰청은 색각이상자를 아예 선발하지 않다가 2005년 인권위로부터 차별 개선 권고를 받고 2006년부터 약도 색각이상자만 응시를 허용했다. 인권위는 색깔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찰관이 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권고하지만 경찰은 “총기 사용, 범인 추적 등 업무를 하려면 색신 기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범죄 용의자의 옷ㆍ신발 색깔 구분 등은 업무에 필요하다는게 경찰 측 주장이다.
2004년 인권위 연구용역사업인 ‘색각이상자의 고용 등에 대한 차별 연구’에 참여한 이화평 근로복지공단 대구병원 직업환경의학과장(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은 “일부 경찰 업무 수행에 색을 잘 구분하는 능력이 필요하더라도 다양한 경찰 업무 중 색 구분 능력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 업무의 다양성을 생각하면 일괄적으로 색각이상자에 채용 제한을 두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다. 더군다나 지원자의 색각이상 정도가 색 구분이 필요한 특정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인지를 판단할 만한 타당한 시험 과정도 없다. 색각이상 유무를 따지는 일반적인 검진을 통해 중도ㆍ강도 색각이상자는 모두 업무 수행 부적합자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운전면허시험에서도 색각이상 여부가 아니라 실제 신호등 색깔을 구분할 수 있는지를 따져 면허증을 발급하는 것처럼 실제 업무수행 능력을 봐야 한다는 의미다. 이화평 과장은 “인권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일부 업무를 제외하고 색각이상자 채용을 허용해야 한다”며 “이들을 경찰 공무원으로 채용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색각이상자 위한 기술 개발, 디자인 연구도
최근에는 색각이상자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기술 개발이나 연구 등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색각이상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사용에 차별이 없고 편리한 디자인을 의미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은 이미 미국, 영국 등에서는 널리 연구되고 있다. 곽영신 울산과학기술원(UNIST) 디자인및인간공학부 교수는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해 “색각이상자든 일반인이든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색을 찾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교통안전표지판이 누구에게나 또렷하게 보이려면 어떤 색을 쓰는 것이 좋은지, 각종 스마트폰 앱 화면 구성을 어떤 식으로 해야 색각이상자도 편리하게 볼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색각이상자들이 구분하기 편한 색상은 표지판이나 애플리케이션(앱), 영상 등 생활 곳곳에서 활용될 수 있다.
장동련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은 “디자인은 그 대상자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색각이상자들을 배려한 디자인은 당연히 연구 대상이 된다”며 “특히 미디어 환경이 확대되면서 앱 화면 안 글자의 가독성을 높일 수 있는 배치나 색상 등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도 많이 진행 될 것”이라고 말했다.
컴퓨터공학에서도 색각이상자를 위한 기술 개발은 진행 중이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모니터를 통해 시각 콘텐츠를 소비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색각이상자에게 적합한 모니터 색을 만드는 게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출시한 스마트폰 갤럭시S10과 노트10 모델에서는색상 대신 선이나 모형으로 기능을 구분할 수 있게 UX(사용자 경험)를 개선했다. 색각이상자를 위한 색상조정기능도 있다. 모니터에서 색각이상자가 잘 인식할 수 있는 색으로 자동변환해주는 기술 등을 연구 중인 한동일 세종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관련 기술들이 실제 산업현장에 적용되는 일이 아직 많지 않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한 교수는 “색각이상자라도 보다 편안하게 모든 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술 연구를 하더라도 실제 디스플레이 관련 기업들이 사업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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