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소설을 보다가 “아, 언젠가는 저 사람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바로 그런 사람이 우리 안의 신화를 일깨우는 사람이며, 진정한 개성화의 모델이 되는 원형적 인물이다. 나는 ‘작은 아씨들’의 천방지축 둘째 딸 조 마치를 보면서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웠고, ‘제인 에어’를 보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히 맞서 용감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제인의 용감무쌍함을 부러워했다. ‘토지’의 서희처럼 누구도 함부로 괴롭히거나 무시할 수 없는 담대함과 꼿꼿함을 닮고 싶었으며, ‘키다리아저씨’의 고아소녀 주디를 바라보며 남들은 다들 당연하게 생각하는 학교생활을 마치 신비한 기적이나 엄청난 축복처럼 여기는 그녀의 천진무구함을 닮고 싶었다. 바로 이런 인물들이 우리를 자기 안의 하나뿐인 신화 속으로 초대하는 마음 속의 영웅들이다. 그 모든 아름다운 인물들의 이상과 나의 현실을 버무려 나만의 신화를 창조해나가는 것이 바로 개성화의 길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인물들은 물론 우리가 동경했던 모든 소설과 영화 속의 매혹적인 캐릭터들이 우리 안의 신화적 원형을 일깨운다. 이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회화의 압력에 맞서 개성화를 추구하는 용기를 지녔다는 것. 무리의 대세를 따르지 않고 오직 자기 안의 신화를 실현하는 용감한 주인공들이었다는 점이다. 고흐가 “남들처럼,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려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들었다면, 우리는 ‘해바라기’의 그 눈을 찌르는 듯한 강렬한 노란 빛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고, ‘별이 빛나는 밤에’의 그 소용돌이치는 듯한 푸르른 밤하늘을 간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행이나 대세를 따르는 것이 사회화라면, 누가 뭐래도 오직 나만의 길을 개척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개성화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신화를 찾아내는 것이 일상 속에서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성화의 고독을 견뎌내는 것이 워낙 고통스럽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들처럼 사는 것의 유혹을 떨쳐내기가 워낙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안의 신화를 실현한다는 것. 그것은 내 안에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목표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평범한 세속적 일상을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이상을 향해 인생을 던질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하다.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에서처럼, 마침내 온 세상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TV 속의 기획되고 통제되는 세계를 벗어나, 위험하지만,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지만, 누구도 걸어간 적 없는 나만의 세계를 선택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개성화의 눈부신 발걸음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나는 좀 더 멋진 영웅적 인물을 롤모델로 삼고 싶었으나 내가 어쩔 수 없이 끌리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영웅도 신도 아닌, 그것도 신의 저주까지 받아 거미가 된 아라크네였다. 아라크네는 작고 연약한 존재였지만 오직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으로, 아테네를 위협하고, 신들의 세계를 용감하게 풍자한다. 내 안에도 신화가 있을까 의심했지만 나는 이제 안다. 나는 아라크네의 창의적인 이야기 솜씨를, 신들의 부패와 비리도 까발리는 용기를, 자신감 넘치는 아테네와의 경쟁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은 뚝심을 사랑한다.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빚어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아라크네는 비록 그 눈부신 재능 때문에 평생 거미로 변하는 무시무시한 처벌을 받는다해도 굴하지 않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비단을 짰다. 나는 아라크네처럼, 신들조차 화나게 만드는 이야기, 신들조차 깜짝 놀라게 만들 이야기를 쓰고 싶다. 개성화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나만의 아우라를 가진다는 것이다. 개성화된다는 것, 그것은 누구도 침해할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나만의 신화를 살아낸다는 것이며 나만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되는 기쁨을 느끼는 일이다. 내 안에 나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함을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의심을 끝내고, 내 안에 이 세상 하나뿐인 개성화의 씨앗이 존재함을 믿는 순간, 내 안의 진짜 신화는 시작된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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