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증오를 부추기는 지식층
민주주의의 신호를 잃어버린 대중
신뢰 회복은 학계와 전문직 사회에 달려
한동안 트럼프 대통령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던 미국 하원 탄핵조사 청문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헌법학자들이 증인으로 나온 날이다. 전날까지 전현직 대사 등 관료들의 증언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우크라이나 측에 부당한 요구를 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굳어진 상황이었다. 백악관과 공화당은 스탠퍼드 법대 교수 파멜라 칼란을 표적으로 삼아 반격을 시작했다. “당신이 누구길래 국민의 절반을 깔보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하는 거야?” 언론 인터뷰에서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고문이 물고 늘어졌다. “예일대 학위 3개를 가지고, 엘리트끼리 어울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한심하다(deplorable)고 멸시하는 자들, 그래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거야.” 칼란 교수는 투표권의 권위자로 오바마 정권 때 진보 진영이 연방최고법원 판사로 강력히 밀던 스타 학자다. 반대편 전문가를 그의 주장이나 논리가 아니라, 성품이나 경력을 가지고 비방하는 것은 익숙한 광경이다. 그런데 트럼프 측이 엘리트 지식인을 향해 계급문제를 걸어 공격할 때는 상당한 울림이 있다.
진정한 전문가의 권위는 어떤 분야든 여야를 넘어서고 진보와 보수 모두에 통해야 한다. 그런 인정을 받는 전문성이 사라지고 있다. 반대되거나 불리한 의견을 피력하는 순간 그의 권위는 한쪽에서 추락한다. 지금은 정치적 진영에 따라 뉴스의 가치가 다르고, 학문의 이론이 다르고, 역사와 진실마저 달라지는 세상이다. 그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데도 전문적 지식을 동원해 해결할 수가 없다. 여론조사 전문가 리처드 에델만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전문가 의견을 쓰거나 전문가를 악마화하면서 사실은 지식을 자급자족하는 “자기 인용 (self-reference)의 세계”가 왔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무지하거나, 소셜미디어 때문에 마음대로 전문가를 고를 수 있게 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불신의 원인은 전문가 쪽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등을 돌린 것은 민중이 아니라 엘리트 지식인들이 아니냐는 뜻이다. 우선 지식과 논리 대신 분노, 공포, 증오 등 감정을 동원하는 전문가가 크게 늘었다. 자기 견해를 관철하기 위해 이성 대신 감성에 호소한다는 것은 전문가란 개념에 모순되지만, 요즘엔 더 흔한 스타일이 됐다. 이날 청문회에서 칼란 교수는 “대통령선거 후엔 트럼프 호텔이 있는 거리도 피해서 걷고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군주제와 대통령제를 설명하면서 “트럼프가 아들 이름을 배런(Barron)이라고 지을 수 있지만 남작(Baron) 작위를 주지는 못한다”고 말해 공격의 구실을 주었다. 심지어 “진보는 모여 살고, 보수는 흩어져 사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자기네들도 서로를 견디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과거 인터뷰발언을 추궁당하자,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말이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격한 감정을 동원하며 문화전쟁의 전사 노릇을 하면서도 일반 사람들의 걱정거리에는 무감각하다. 지식 엘리트층이 그냥 그대로 지배계급이 된 것은 민중의 신뢰를 잃은 더 큰 계기다. 특히 트럼프의 미국뿐 아니라, 영국, 폴란드 등에서 전문가와 학계의 진보엘리트들은 계급담론을 우익 포퓰리즘 정권에 빼앗겼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 영국 보수당의 법무장관 마이클 고브는 “자기네들이 제일 잘 알고 있다면서 계속 틀리기만 하는 전문가들, 이젠 국민이 질렸다(People had enough of experts)”라고 말해 큰 반향을 불렀다. 경제적 신분 추락과 교육의 격차 등 이른바 현실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잘못된 처방이 불만인데, 전문가들은 여전히 관념적인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지만, 과연 국민이 그런 민주주의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제기돼 왔다. 그래도 국민이 주요 국면에서 방향을 크게 틀리지 않고 판단해온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엘리트 큐 (elite cue), 전문가들이 대중에게 보내는 신호 때문이다. 학계와 전문직 사회의 내부 소통이 신호등을 다시 켜는 첫걸음이 될 것으로 본다.
유승우 뉴욕주립 코틀랜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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