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디즈니의 ‘겨울왕국2’가 개봉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미 천만 관객 돌파를 예상했다. 그리고 그건 이변 없는 현실이 되었다. 겨울 시즌에 최적화된 콘텐츠, 천만 관객을 넘겼던 시즌1의 아우라, 무엇보다 최근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젠더 감수성을 개념으로 장착하고 ‘바지 입은 공주’를 꺼내 놓으면서도 이를 환경문제, 소수민족 문제 등과 엮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만든 콘텐츠의 영리함 등등. 이 정도면 천만 관객 돌파를 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런 모든 요건들을 압도한 건 이 영화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스크린 독과점이다. 서민민생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이 영화는 지난 달 23일 기준으로 스크린 점유율 88%, 상영 횟수 1만6,220회로 지난 ‘어벤져스:엔드게임’의 역대 최고 상영 횟수 기록을 갈아 치웠다고 한다. 지난 4월 개봉해 1,390만 관객을 동원한 ‘어벤져스:엔드게임’과, 11월 개봉해 천만 관객을 넘긴 ‘겨울왕국2’. 사실상 올해 우리네 영화관의 상반기와 하반기를 모두 디즈니에서 싹쓸이한 셈이다. 조사 주체에 따라 점유율 수치에는 차이가 있지만 점점 과해지는 스크린 독과점을 보다 보면 아찔해진다.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스크린 독과점은 디즈니 같은 거대 해외 제작사 영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기획, 투자, 배급, 상영까지 모두 수직 계열화되어 이제 거대 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 문제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호평을 받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역시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일으켰다는 건 이 문제의 초점을 잘 보여준다. 이 영화를 투자 배급한 CJ는 알다시피 극장 유통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첫 상영 스크린 수만 1,783개를 잡았고 이를 1,947개까지 늘렸다. 워낙 작품이 완성도와 대중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데다 초반 기세까지 스크린 수로 잡아 버리니 천만 관객 돌파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아이러니한 건 ‘겨울왕국2’의 미국 스크린 점유율은 30%를 넘지 않았고, ‘기생충’의 경우 처음 3개관으로 시작해 영화의 반응이 좋아지자 33개, 461개, 603개로 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차츰 반응에 따라 스크린 수를 늘려가거나, 일정한 스크린 수를 유지한 채 개봉 일을 좀 더 길게 잡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까. 흔히들 초반 흥행이 영화 성공의 관건이라는 이유를 들지만, 이건 엄밀히 말하면 극장이 그런 패턴으로 관객몰이를 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자본에 의해 시작점 자체가 다른 채 줄 세우기 하는 불공정한 콘텐츠 인프라는 영화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블락비 박경이 자신의 트위터에 특정 가수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제기한 ‘음원 사재기’ 의혹도 우리네 불공정한 콘텐츠 인프라의 한 단면이다. 이미 오래도록 논란이 되어 왔지만 그때마다 ‘바이럴 마케팅’이라는 이야기로 무마되곤 했던 음원 사재기 문제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어쨌든 차트가 대중들의 선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재기든, 마케팅이든 그만한 자본을 투여해 왜곡될 수 있는 차트를 어째서 개선하거나 버리지 못하고 있을까. 그 뒤에 놓여진 자본의 방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불공정한 콘텐츠 인프라의 문제로 최근 또한 떠오르는 이슈가 ‘망 사용료’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국내 통신사와 콘텐츠 업체들 간의 갈등이다. 문제는 국내 통신사가 국내 콘텐츠 기업들에는 매년 수백억 원의 망 사용료를 받으면서, 해외의 글로벌 콘텐츠 기업들에는 제대로 사용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유튜브나 최근 국내 가입자를 급속도로 늘리고 있는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콘텐츠 기업들이 해외 기업이라는 이유로 망 사용료를 전혀 내지 않고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망 사용료 자체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매우 비싸기 때문에 국내의 중소 스타트업 업계가 경쟁력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점이다. 왓차플레이 박태훈 대표가 최근 통신사의 과도한 망 사용료에 대한 불만을 터트린 건, 국내에서 중소 스타트업 업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통신사와 결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현실이 들어 있다. 최근 국내 지상파들이 SKT와 결합해 웨이브라는 OTT를 출범한 것처럼.
영화계의 스크린 독과점 문제나 가요계의 음원 사재기 그리고 콘텐츠 업계의 망 사용료 논란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국내 콘텐츠 인프라가 얼마나 불공정하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거기서 어른거리는 단어들은 ‘순위’와 ‘자본’ 그리고 ‘수직 계열화’다. 자본의 힘은 이제 인프라를 쥐고 콘텐츠들의 성패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이런 불공정함은 자본의 힘에 의해(부모의 경제력) 태생부터 미래가 결정되는 우리네 사회의 모습 그대로다. 이래서야 건강하고 경쟁력을 가진 콘텐츠 생태계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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