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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의 우충좌돌] ‘기생충’엔 좋은 말들이 너무 많다

입력
2019.12.17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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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상은 행운이면서 나쁜 권위로도 작용

문화예술, 칭송의 권위주의에 빠지기 쉽다

영화가 주는 서로 다른 불편함을 구별해야

‘불평등한 현실을 비판한’ 영화라는 해석이 많은데, 동의하기 어렵다. 기택 가족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가족을 야비하게 내쫓고 죽이는 모습, 박 사장네와 사돈이 되겠다며 떠드는 모습은 그런 해석을 비웃는다. 영화 ‘기생충’ 스틸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불평등한 현실을 비판한’ 영화라는 해석이 많은데, 동의하기 어렵다. 기택 가족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가족을 야비하게 내쫓고 죽이는 모습, 박 사장네와 사돈이 되겠다며 떠드는 모습은 그런 해석을 비웃는다. 영화 ‘기생충’ 스틸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연말이니 ‘올해의 영화’에 대해 말해 보자. 칸에서 한국영화가 한 번도 대상을 받은 적이 없었고 영화계에서 그 상이 가지는 특별한 권위를 따지면, ‘기생충’에 대한 거국적 흥분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 여세를 몰아 투자 배급사 CJ는 상영관을 1,900개 정도 독점했고, 흥행몰이도 성공했다. 그러나 영화제의 권위를 빌려 투자배급 자본이 관객을 동원하는 시스템은 상당히 기형적이었다. 리뷰도 좋은 말과 칭송으로 넘쳤다. 물론 리뷰도 문화산업의 한 부분이지만, 너무 심했다.

오락 차원에서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평적 리뷰의 차원에서 좋다는 것은 다른데, 그 차이가 아예 뭉개졌다. 자발적으로 보고 느낄 기회 자체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채, 칭송의 권위주의가 작동한 셈이다. 칸 대상 수상이라는 행운이 ‘나쁜’ 문화적 권위로도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 ‘기생충’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일반 소비상품이나 스포츠가 사용자에 의해 실용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것과 달리, ‘문화예술’ 작품의 평가는 오히려 자본이나 권위에 예속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렇게 계속 간다면, 문화예술은 점점 위험한 상품이 될 터이다.

물론 기술적 완성도와 미학적 장치에서 ‘기생충’은 뛰어난 면이 많다. 그러나 정말 최고 수준의 영화일까? 우선 개연성이 부족하고 작위적인 스토리가 많다. 백수였던 기택 가족이 한꺼번에 박사장네 집에 취업하는 초반 스토리, 살인 이후에 그 가족이 가벼운 처벌을 받고 별일 없었듯 새 삶을 시작한다는 후반 설정은 상당히 작위적이다. 다음으론 캐릭터들이 모호하다. 부자 박사장네 사람들은 착하거나 순진하고 가난한 기택 가족은 비열한데, 정말 리얼한가? 기우 엄마는 남편 엉덩이를 발로 차며 막말을 하는 수준인데, 그럴 필요가 있나? 기택과 다혜 엄마가 손을 잡는 유치한 장면은, 왜? 하층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해석도 있지만, 캐릭터가 괜히 야비하거나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무엇보다 슬랩스틱 코미디 스타일과 비극적 스타일이 뒤섞여 있어서 도착적이다. 킥킥거리던 기택가족, 무릎 꿇고 손을 든 그들 앞에서 낄낄거리던 문광부부. 해까닥, 살인하는 인물. 가학적 피학성이 너무 도착적이지 않은가.

‘불평등한 현실을 비판한’ 영화라는 해석이 많은데, 동의하기 어렵다. 기택 가족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가족을 야비하게 내쫓고 죽이는 모습, 박 사장네와 사돈이 되겠다며 떠드는 모습은 그런 해석을 비웃는다. ‘냄새’는 그 자체로는 사회적 갈등을 보여 주는 괜찮은 장치지만, 그 때문에 기택이 살인을 한다는 설정이나 해석은 조금 단순하다. 내가 보기에, 냄새는 과잉 해석된 점이 있다. 결국 모두 서로를 죽이는 사회를 그렸다는 해석도 있지만, 돈을 많이 벌어 박 사장 집을 살 것이고 아버지는 지하실에서 사뿐히 걸어 나오면 된다는 기우의 편지는 그런 해석도 조롱한다. 악마적인 사회 시스템을 그리려면 차분하거나 냉정한 스타일이 필요하다.

‘기생충’이 그저 불편하다는 말이 아니다. 많은 영화들이 폭력적인 사회를 보여 주는 상황에서, 그것들이 주는 불편함을 잘 구별해야 한다. 거짓 환상을 깨면서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 주는 영화도 불편하지만, 우리는 환상을 되돌아보고 차분함이나 냉정함을 되찾는다. 대놓고 세상을 조롱하는 영화도 불편하지만, 그것이 코미디라는 걸 우린 안다. 그러나 유치한 코미디와 잔혹한 폭력과 휴머니즘을 뒤섞어 놓은 영화가 주는 불편함은 그와 다르다. 환상을 깨지도 않고 비극성을 반추하지도 않고 그냥 코미디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런 코미디와 잔혹함과 휴머니즘이 뒤섞여 있는 도착적인 스타일이 한국 영화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유감스럽게 ‘기생충’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영화는 오락으로서 얼마든지 희극적 요소와 잔혹함을 섞을 수도 있고, 거꾸로 비극의 방식으로도 냉정하게 폭력성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둘을 모두 잡기는 실제론 어렵다. 그 어려움이 존중되면 좋겠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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