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과학소설가 조지 웰스는 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31년 전에 원자탄이 등장하는 ‘해방된 세계’(1914)라는 소설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8년, 유럽 각국의 물리학자들은 소설가의 상상이 공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주요 참전국들은 비밀히 원자탄 제조에 착수했다. 나치 독일은 1939년, 핵무기 개발을 위해 40여명의 우수한 물리학자를 불러 모았고 그 중심에 아이젠슈타인의 학문적 경쟁자였던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 나치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해 원자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우라늄 광산도 확보했다.
미국 정부는 원자탄 개발에 영국보다 소극적이었다. 그 분위기를 돌려놓은 것은 1939년 8월에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첫 번째 서한과 두 번째 재촉 서한이었다. 루스벨트는 1941년 12월에서야 기존의 원자력 자문 위원회를 강화했고, 이듬해에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원자 핵무기 개발 부서를 군부에 설치했다. 이 부서에서 민간 과학자들을 총 지휘한 인물이 오펜하이머다.
안준호의 ‘핵무기와 국제 정치’(열린책들, 2018 개정증보판)에는 누가 먼저 원자탄을 만드느냐를 놓고 나치와 연합국이 벌였던 치열한 경쟁이 나온다. 하지만 그보다 관심을 끈 것은 히틀러의 어리석음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공통되게 지적하고 있는 그의 패착은 아리안 순혈주의와 인종주의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가 필요한데, 그러자면 출생지와 인종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제국에 필요한 인재는 한 장소와 한 시기에 동시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히틀러에게는 이런 원칙이 안중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물론 제국이 아니지만, 어느 나라에서든 제국의 원칙은 유효하다. 그러나 이것은 칼럼의 주제가 아니다. 원자탄 개발 경쟁의 승부처로 다시 돌아가자.
“당시 미국의 과학은 유럽에 비해 확실히 한 단계 뒤떨어진 상태에 있었다. 모든 과학적 발견은 유럽에서만 일어나는 것만 같았고, 미국은 언제나 그들이 이룬 업적을 몇 달 후에 보고서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나치 정권은 유대 혈통의 과학자들을 잡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 과학자들이 안전한 미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비록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나치 정권에 협력하기 싫은 과학자들도 미국행을 택했다.”
이창위의 ‘북핵 앞에 선 우리의 선택’(궁리, 2019)에는 다른 관련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본제국의 원자탄 개발 비화가 나온다. 일본 군부는 진주만 기습을 하기 20개월 전인 1940년 4월부터 원자탄 개발을 본격적으로 검토했고, 1941년에는 니호연구(二號硏究)라고 명명된 원폭제조 연구에 돌입했다. 연구와 개발 책임을 맡은 니시나 요시오는 유럽에서 닐스 보어의 지도하에 갓 태동한 양자역학을 배웠다. 일본은 우라늄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와 동남아시아까지 탐색했지만 결국엔 동맹국인 독일에 도움을 청했다. 독일은 1945년 3월에 우라늄을 함유한 광석 피치블렌드(pitchblende)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광석을 실은 잠수함이 킬항을 출발하고 난 한 달 정도가 되어 독일이 항복을 함으로써 수송 작전은 중단되었다. 이런 사실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상처를 내세워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죄상을 덮으려는 일본 우익의 술수를 우습게 한다. 만약 일제가 원자탄을 먼저 만들었으면 어땠을 건데? 가미가제를 만들어 자기 병사까지 무수히 죽음으로 내몰았던 게 일제였다.
미국(1945), 구소련(1949), 중국(1964), 인도(1974), 이스라엘(1979?), 파키스탄(1998), 북한(2006)의 핵무기 개발 역사를 보면, 하나같이 적대국과의 극한 대치 또는 체제 붕괴의 위협이라는 궁박한 이유 때문에 핵무장에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이라고 별달라야 할까? 적대국이 핵을 가졌을 때는 똑같이 핵을 가져야 공포의 균형이 유지된다. 친구가 지켜 준다지만, 국제정치에서 동맹이란 어떤 경우에도 평등하지 않다. 이 친구가 보호비로 매해마다 6조원씩 뜯어 가겠다고 하니, 차라리 한 기에 1조원이면 만드는 원자탄을 만드는 게 낫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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