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에선 ‘힘의 논리’가 목소리 크기를 결정합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이 보유한 무기를 깊이 있게 살펴보며 각국이 처한 안보적 위기와 대응책 등 안보전략을 분석합니다.
지난달 8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 이맘호메이니 국제공항을 이륙해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향하던 우크라이나항공 소속 항공기 보잉 737-800 여객기가 이륙 2분 만에 교신이 끊겼다. 오전 6시18분쯤 여객기는 땅에 떨어졌고, 탑승 인원 176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란이 가셈 솔레이마니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정예군(쿠드스군) 사령관을 폭살한 미국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이 주둔한 이라크 아인 알아사드 공군기지와 에르빌 기지를 미사일 공격한 지 5시간 만의 일이다. 미국과 캐나다 등이 이란의 격추 가능성을 제기했고, 부인하던 이란은 적의 군용항공기로 오인 공격했음을 인정했다.
그때 우크라이나 여객기를 타격한 미사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명으로는 ‘SA-15’로 불리는 러시아제 지대공 미사일 ‘토르-M1’다. 2005년 이란이 러시아 측에 7억달러(약 8,141억원)에 달하는 무기 계약의 하나로 들여왔다. 그런데 왜 하필 이란은 러시아제로 ‘반격’을 시도했을까.
◇“이란이 보유한 가장 현대적인 방공 시스템”
마이클 도이츠먼 미 미들버리 국제학연구소 연구원은 지난달 10일 로이터통신에 토르 미사일을 “이란이 가진 가장 현대적인 방공 시스템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토르는 미사일 발사대와 레이더를 장갑차 한 대에 장착한 단거리 방어시스템이다. 한 번에 두 개의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다. 레이더로 궤도를 찾아가며 음속의 3배 가까이 빠르게 발사된다. 5㎞ 거리의 목표물을 5초 이내에 타격할 수 있다는 얘기다. 토르 미사일 탄두는 약 15㎏으로 가벼운 편이지만 목표물 안으로 탄환 같은 금속 조각을 퍼뜨리도록 설계돼 파괴력은 막강하다.
보통 순항 미사일과 군항기는 레이더를 피하면서 운행한다. 열 추적 미사일의 미끼 역할을 하거나 레이더를 교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민간 여객기인 보잉 737-800엔 이런 기능이 없다. 더욱이 조종사들이 대응하기 힘든 이륙 직후에 타격됐다. 도이츠먼 연구원은 “조종사들은 미사일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챌 여력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에 전했다.
◇러시아 배후에 있었나
전문가들은 독립적인 위성기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이 정확하게 목표를 설정하고 맞췄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현재 운용 중인 전 세계 위성위치확인시스템은 4개뿐이다. 미국의 위성항법장치(Global Positioning SystemㆍGPS), 유럽의 갈릴레오(Galileo), 러시아의 GLONASS(GLObal NAvigation Satellite System), 중국의 베이더우(北斗)다. 사실상 이란이 GPS나 갈릴레오를 이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미국과 유럽은 각각 2018년 8월과 지난해 11월부터 이란과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의 거래를 제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중국과 러시아뿐이다. M.K.브하드라쿠마르 인도 전 외교관은 지난달 30일 홍콩 매체 아시아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토르-M1은 레이더와 미사일 발사대가 독립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며 “러시아제 토르-M1이 GLONASS에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이에 대해 이란 측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상태다.
브하드라쿠마르는 “항공기 사고 직후 이란이 격추 책임을 부인할 당시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이 ‘추락 사태의 책임이 이란에 있다는 주장을 제기할 근거가 없다’고 이란에 힘을 실어준 것도 러시아가 이란과 정보 공유 협정을 맺고 있다는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대목”이라고 평했다.
◇미ㆍ이란 긴장 국면과 웃고 있는 러시아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란의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 전후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행보다. 푸틴은 격추 전날에는 시리아 대통령을, 다음날에는 터키 대통령을 만났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중동 전역에서 푸틴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보여준 한 주였다”고 평가했다. 중동 내에서 반미 기류가 생겨나는 것을 이용해 중동 ‘중재자(peacemaker)’ 역할을 자처하는 등 러시아가 영향력 확대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푸틴의 광폭 행보는 격추 다음 날에도 계속됐다. 9일에는 크림 반도 인근의 흑해에서 실시된 북해ㆍ흑해 합동군사훈련을 참관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날 이란 해안선 북쪽 아라비아해에서 미 해군 구축함 ‘USS 파라거스’와 러시아 정보 수집함 ‘RFS 이반 허스’가 마주쳤다. 브하드라쿠마르는 이를 “러시아가 그 지역에서 미국 항공모함 전투단의 작전을 미행하고 있었던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가 이란 주변의 상황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어떠한 긴급한 군사적 충돌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미국 측에 보내는 것이라는 얘기다. 러시아 군사전문매체 리들은 지난달 28일 “미국의 대이란 압박은 러시아가 이란을 보호해 줄 명분이 되기도 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란에게 절실한 안보 동맹 러시아
이란 입장에서도 러시아는 안보 전략상 중요한 동맹이다. 군사ㆍ경제력 등 전통적인 ‘하드파워’로 미국에 대항할 수 없는 이란으로서는 러시아처럼 뒤에서 받쳐줄 지원자가 꼭 필요하다. 미 CNBC 방송은 지난달 9일 “경제난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란은 군사적으로 정적 미국, 이스라엘에 한참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엘리 제란마예 유럽외교위원회(ECFR) 이란 전문가도 자신의 트위터에 “미국과 이란이 이번 공개 대결 후 대리인을 내세워 공격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란의 억지력을 좌우하는 탄도미사일이나 순항미사일 체계에서 러시아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이란의 대공 미사일은 대부분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전에 도입, 배치됐다. 그나마 이란이 보유한 방공 무기 중 현대적인 것은 2005년에 산 토르-M1과 2016년에 산 러시아제 ‘S-300’이다. 둘 다 최초 실전배치 시기가 각각 1986년과 1997년이어서 이란은 방어용 무기시스템을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는 지적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이제 관심은 러시아가 최신 중장거리 지대공미사일 시스템 ‘S-400’을 이란에게 판매할 것인가의 여부다. S-400은 S-300을 향상시킨 것으로, 최대사거리가 400㎞이며 최대고도는 185㎞이다. 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은 지난해 11월 보고서를 내 “이란이 계속해서 러시아의 전차 ‘T-90’, 방공미사일 S-400, 공군 전투기 ‘수호이(Su)-30’ㆍ’Yak-130’에 눈독을 들여 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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