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봉준호 감독
※ 영화도 사람의 일입니다. 참여한 감독, 배우, 제작자들의 성격이 반영됩니다. <영화로운 사람>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가 만나 본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의 삶의 자세, 성격, 인간관계 등을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의 면면을 되돌아봅니다.
2013년 6월 제63회 에든버러 국제영화제를 갔다가 개막 파티에서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그는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돼 에든버러를 찾았는데, 조금은 의아했다. 봉 감독은 ‘설국열차’의 개봉(2013년 8월 1일)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설국열차’는 제작비 430억원가량이 들어간 충무로의 초거대 프로젝트였다.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번스 등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영화였다. 규모에 압도돼 밤잠을 이루기도 쉽지 않았을 만한 때였다(‘설국열차’의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은 ‘설국열차’의 체코 촬영장을 찾았을 때 “(촬영에 지친) 봉 감독이 (유령처럼) 발 없이 공중에 떠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하루하루가 아까운 상황에서 봉 감독이 장시간 비행을 무릅쓰고도 에든버러를 찾은 건 약속 때문이었다. 심신이 지칠 만도 한데 봉 감독은 “에든버러에 사는 (‘설국열차’ 출연배우) 존 허트와 식사를 하기로 했다”며 설렌 모습이었다.
봉 감독과 조우 후 이틀쯤 지나 극장에서 영국 기자 둘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됐다. “오늘 봉 감독 인터뷰 어땠어?” “너무 좋았지. 아주 친절하더라고.” “내일 인터뷰가 더 기대되는데.” 별거 아닌 듯한 대화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감독들, 특히 개봉을 앞둔 이들은 예민하고, 까칠하고, 제멋대로이기 마련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기에 충분했다.
◇차분하게, 섬세하게
봉 감독은 배우와 스태프 등을 배려하고,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대중은 봉 감독이 장면 하나하나를 치밀하고 섬세하게 만든다고 해서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고 부른다. 주변의 평가를 종합하면 그는 영화 만듦새 못지 않게 인간관계에서도 디테일이 강하다. 차분하고 섬세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사례는 여럿 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 시고니 위버가 2010년 11월 한국일보 주최 세계여성리더십컨퍼런스 특별연사로 한국을 첫 방문했을 때다. 위버는 가장 만나고 싶은 한국 영화인을 묻자 봉 감독을 바로 꼽으며 봉 감독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할리우드에서 봤을 때) 저예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괴물’을 보고선 반해 그의 다음 작품인 ‘마더’(2009)도 너무 궁금하다”고도 했다. 봉 감독 일정 때문에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봉 감독은 필자에게 위버가 ‘마더’ DVD를 받을 수 있는 주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위버가 DVD를 받고선 할리우드의 지인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봉 감독은 지난달 말 제49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9일)을 앞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때였다. 지난달 27일 미국 연예전문 매체 할리우드리포터에 따르면 로테르담 영화제는 몇 년 전 봉 감독에게 심사위원을 제안하고, 봉 감독은 새 작품 준비 때문에 2020년에나 가능하다고 응답했다. 새 작품인 ‘기생충’이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고, 아카데미상 수상 경쟁에 뛰어들면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봉 감독은 ‘기생충’ 흑백판을 로테르담 영화제가 세계 첫 상영할 수 있도록 했고,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을 오가는 일정 속에 로테르담을 찾았다. 봉 감독은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 상영으로 로테르담 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봉준호 월드’에 절대 악인은 없다
영화 밖 봉 감독의 언행은 영화 속 내용과 밀접하기도 하다. ‘봉준호 월드’에는 절대 악인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어나가고, 체제에 반기를 둔 유혈 봉기가 발생하나 사건에 간여한 사람마다 각자의 인간적인 사정이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조차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를 절대악으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지만, 공권력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마더’의 엄마(김혜자)와 아들(원빈)은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위하여, 또는 자신의 자존을 지키려 우발적으로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설국열차’의 악인이라 할 윌포드(에드 해리스)는 열차라는 체제 또는 생태계 유지를 위해 약자의 희생을 감내하는 지도자다. ‘기생충’ 속 거부 동익(이선균)도, 부정직한 방식으로 동익의 집에 온 식구를 기생시키는 기택(송강호)도 몹쓸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사회구조 속에서 누군가는 최상층을 차지했고, 누군가는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자기 이익 챙기기에 바쁜 평면적인 악인은 ‘설국열차’의 총리 메이슨과 ‘옥자’ 속 유전자기업 CEO 낸시(이상 틸다 스윈튼) 정도다.
그렇다고 ‘봉준호 월드’가 양비론 또는 양시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봉 감독은 절대악도 절대선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눈은 낮은 곳으로 향한다. 주인공은 교수 갑질에 시달리는 시간강사이거나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직을 권고 당한다(‘플란다스의 개’). 한강변 매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한 가족은 괴물의 등장으로 삶이 파괴되지만 국가는 그들의 사정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괴물’). 체제를 전복하려 하고,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연대하는 이들은 사회 주변부, 힘없고 보잘것없는 이들이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 배려, 신뢰를 지닌 사람만이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 시선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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