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교수 한국이란 무엇인가] <10>좀비물로 보는 17세기 한국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 이 글에는 드라마 킹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왕이 죽었다. 외척 조학주 대감은 세자 이창이 아니라 자기 핏줄을 왕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딸 계비 조씨가 아들을 출산할 때까지 왕이 살아 있어야 한다. 조학주는 명의(名醫) 이승희를 불러 이미 죽은 왕을 좀비 상태로나마 살려 놓는다. 그러다가 그만 이승희의 조수 단이가 좀비 왕한테 물려 죽는다. 이승희 의원의 환자들은 배고픔에 못 이겨 단이의 시체를 먹고, 좀비로 변하고 만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은 조선, 이제 좀비 천지가 된다.
이것이 현재 넷플릭스에서 절찬 상영 중인 조선 시대 배경의 좀비물 ‘킹덤’의 줄거리다. 장르물에서 좀비는 정치적 상징으로 널리 활용되어왔다. 좀비는 원칙 없는 정치인, 신자유주의 추종자, 문화적 공포와 억압 등 전염력 높은 정치적 문제들을 널리 상징해왔다. ‘킹덤’ 역시 이러한 장르 전통을 이어받는다. 그렇다면 ‘킹덤’의 조선 좀비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어떻게 환기하고 있을까.
김은희 작가는 인터뷰에서 순조실록에서 이름 모를 괴질로 수만 명이 숨졌다는 이야기를 보고 ‘킹덤’을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지만, 실제 드라마의 배경은 17세기 조선으로 보인다. 좀비의 시작을 근과거에 일어난 왜란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1592년에 일어난 왜란이 1598년 겨울까지 이어졌고, 왜란의 참상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킹덤’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17세기 조선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먼저 정치사를 살펴보자. 신하와 군주의 대결을 그리는 ‘킹덤’의 설정은 17세기 조선의 예송(禮訟)과 닮아있다. 당시 법도대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문제가 간단하련만, 늘 그런 사람이 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자가 아닌 차자, 혹은 다른 부인의 자식, 혹은 방계의 왕족이 왕위를 이을 경우, 세자의 정체성은 복잡해진다. 과연 왕의 후계라는 점이 더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혈육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중요한 것일까. 어느 정체성에 맞추어 예를 지켜야 할까. 한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17세기 예송(禮訟)이 군권(君權)과 신권(臣權)의 대결 구도였다고 해석해왔다. 이런 예송이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6세기 명나라 가정제(嘉靖帝)는 정덕제(正德帝)의 뒤를 이었지만, 그는 정덕제의 장자가 아니라 사촌 동생이었기에,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것이 이른바 대례의(大禮議) 논쟁이다. ‘킹덤’에서는 결국 혈통과 무관한 무관(武官)의 아이가 출생의 비밀을 숨긴 채로 왕으로 오르게 된다.
‘킹덤’에서는 조학주 대감과 맞서는 세자 이창을 돕는 재야의 명망 있는 선비가 나온다. 세자의 옛 스승인 안현 대감은 비록 관직 없는 초야의 인물이지만, 조정에서도 두려워하는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 17세기 조선에서도 현종(顯宗)이 세자였을 때 서인의 송시열이 스승이었고, 그 송시열은 당시 조정에서도 어려워하는 재야의 거두였다. 송시열 역시 조정에서 벌어지는 예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치사가 이러했다면, 사회사는 어떠했나. 사회사의 관점에서 볼 때 17세기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왜란보다도 더 혹독했을 대기근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왜란의 사망자는 수십만 명의 정도였다고 추산된다.
그런데 사학자 김덕진에 따르면,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과 을병대기근(乙丙大飢饉, 1695-1699)에 각각 100만 명 정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사료에도 그와 같은 정황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이 많다. 예컨대 ‘지암일기’(支庵日記) 1696년 1월 28일자에는 “청계 사람이 구걸하려고 자루를 들고 나와 돌아다니다가, 이내 다시 생각하여 ‘길에서 죽는 것보다 집에서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고는 돌아가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킹덤’에서 사람들이 배가 고파 인육을 먹는 상황도 아주 황당한 묘사는 아니다. 조선왕조실록도 기근으로 굶주린 자들이 “실낱 같은 목숨이 남아 있어도 귀신의 형상이 되어 버렸다”(縷命雖存, 鬼形已具)고 묘사하고 있으니, 좀비와 같은 형상을 상상할만하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인육을 먹었을 리가 있냐고? 1671년에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청주 상당산성 기우제문(淸州上黨山城祈雨祭文)’에는 “옛날에는 자식을 바꾸어서 먹는 일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에는 자기 자식을 삶아 먹는 경우가 있으니, 인간이 살아남지 못하고 인간의 도리가 다 없어질 것입니다”(古稱易子而食, 而今則自烹者有之矣. 人類將無遺矣, 人理將盡滅矣.)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러한 표현이 단순히 제문 특유의 과장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 ‘현종실록 12년 3월 21일’에는 여자 노비가 자신의 어린 아들과 딸을 먹었다는 취지의 기록이 실려 있다(私婢順禮居在深谷中, 殺食其五歲女三歲子) 이 여자 노비의 이름은 순례(順禮), 즉 예를 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약 한 세기가 지나 ‘흠영’ (欽英) 1782년 조에도 노파 둘이 아이를 먹은 식인기록이 있다.
순례의 이름이 하나의 역설이 되어버렸듯이, ‘킹덤’에도 좀비가 된 동방예의지국 사람들이 부모 자식을 몰라보고 서로를 물어뜯는 장면들이 비일비재하게 나온다. 해가 저물자 깨어난 조선 좀비들은 서양 좀비들보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떼 지어 이동한다. 그러다가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 같은 존재가 보이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족족 다 물어뜯어서 동네 전체를 좀비 마을로 하향 평준화시킨다.
실로 17세기 대기근에는 인륜이 유지되지 못했다. 당시 지방관들의 보고에 의하면, 무덤을 파서 옷을 훔치는 경우(發塚剖棺, 偸取歛衣), 옷자락을 잡고 따라오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버리는 경우(六七歲兒, 挽裾而從者, 至於縛樹而去), 도처에서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경우 (赤子之棄溝投水, 無處無之)들이 있었다. 맹자가 말한 바, 우물에 빠지는 어린아이를 구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에 기초한 나라가 근본적인 위기에 처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 특유의 상황이라는 말은 아니다. 경제사가 이시이 칸지(石井寛治)에 따르면 일본의 텐메이 대기근(天明の大飢饉, 1782-1788) 때에도 약 90만 명의 인구감소가 있었다고 한다. 역사가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ter)는 모택동 치하의 대약진운동 시기(1958-1962)에 일어난 대기근으로 인해 적게는 4,500만 명 많게는 6,000만 명이 조기 사망했다고 말한다. 이 시기에도 식인이 발생했다. 당시 란저우(兰州) 시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생계문제”로 인해 누나를 “살해한 후 먹음,” 관계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시신을 파헤쳐 먹음,” 동네 사람을 “난자해서 죽인 뒤 요리해 먹음.”
끝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오늘날 좀비란 무엇인가? ‘국제정치 이론과 좀비’라는 저서를 쓴 정치학자이자 좀비 연구학회 회원인 대니얼 W. 드레즈너는 “좀비에 대한 정의는 의식이 없는 인간이라는 철학적 정의부터, 땅에 묻혔다가 주술사에 의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는 인류학적 정의까지 다양하다. 좀비 연구학회와 마찬가지로 나는 좀비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 숙주를 점거하고 있는, 인육을 먹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생명체로 취급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좀비의 결정적 특징은 씻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병이 창궐해도 좀비는 결코 손을 씻지 않는다. 씻는 좀비는 좀비가 아니다. 씻는 좀비는 “동그란 네모” “짧은 장총” “못생긴 미남” “즐거운 시험” “Good morning”처럼 형용모순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좀비들은 한결같이 더럽다. 공포물의 또 다른 주인공인 뱀파이어와 뚜렷이 구별되는 좀비만의 특징이다. 자신이 좀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손을 씻어야 한다. 감염병이 돌 때는 손을 씻자.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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