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24>자유주의를 생각함
1994년 유학 가서 처음으로 참여한 수업. 법철학 세미나였다. 토론 중 한 학생이 그날 신문을 들고 와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관한 기사를 읽어준다. 이 사건은 내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그 추상적인 이론이 실은 우리 일상과 밀접히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그 깨달음이 20년 넘게 이어질 이 지겨운 논객질의 토대가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자살?
세미나 교재는 자크 데리다의 텍스트 ‘법의 힘’이었다. 이 글에서 데리다는 좌익 평론가 발터 베냐민과 나치 법학자 칼 슈미트, 양극에 위치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공통성이 존재한다는 데에 주목한다.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연약한 자유민주주의 정권을 좌익은 혁명으로, 우익은 쿠데타로 전복시키려 했다.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니라 민주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의회의 다수가 되자, 그는 다수의 힘으로 민주주의부터 파괴하기 시작했다. 야당은 해산되고, 노조는 금지됐다. 민주주의가 민주적으로 자살해 버린 것이다. 개인과 소수에 대한 존중 없이 다수결로만 환원된 민주주의는 이처럼 반대물로 전화하기 마련이다. 그런 민주주의라면 북한에도 있다. 북한도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아닌가.
이렇게 나치가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자유주의적 권리를 파괴할 때 거기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이가 바로 칼 슈미트였다. 우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보족적 관계로 본다. 즉 다수결의 원칙이 다수의 폭력으로 흐르지 않도록 그것을 자유주의로 수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칼 슈미트는 이와 달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대립시킨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죽이다 ?
‘정치’에 대한 그의 독특한 관념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를 ‘계층 간 갈등을 의회에서 대화로 조정하는 절차’로 이해한다. 하지만 슈미트는 이 자유주의적 관념이 정치성(das Politische)의 본질을 거스른다고 본다. 그가 생각하는 정치는 이런 것이다. “정치적 구별이란 본래 적(敵)과 아(我)의 구별이다. 그것이 인간의 행동과 동기에 정치적 의미를 준다. 모든 정치적 행동과 동기는 결국 그 구별로 환원된다.”
정치란 본질적으로 세상을 적과 아로 가르는 행위라는 것이다. 슈미트는 갈등을 조화로, 정복을 교역으로, 투쟁을 논쟁으로, 증오를 관용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자유주의의 오류라고 단언한다. 애초에 그런 평화로운 세계가 가능하다는 믿음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피아의 구별에 있기에, 그는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정치성 자체를 말살한다고 보았다.
칼 슈미트는 끝없는 토론(Diskussion)으로 미결정의 수렁에 빠진 바이마르 의회주의보다 지도자의 결단(Dezision)으로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이 더 우월한 체제라 보았다. 토론을 멈춘 ‘시민’들은 이제 지도자만 믿고 투쟁하는 ‘전사들’로 변한다. 전사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정치신학적 열광뿐. “우리 아돌프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그 결과가 어땠는지 우리는 안다.
◇적과 아를 갈라라
슈미트가 환생했나. 민주당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그들은 세상을 적과 아로 나누는 것을 정치로 보는 듯하다. 그 적은 물론 수구세력, 적폐세력이다. 민정수석이 SNS에 “죽창가”를 올리고, ‘한일전’이 총선 슬로건으로 내걸린다. 적개심으로 뭉친 지지자들은 “토착왜구”를 섬멸하는 민족해방의 전사가 된다. 그들이 윤미향을 못 놓는 것도 그의 활동을 이 NL(민족해방계열) 서사의 중요한 일부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이 전쟁서사는 의정으로 이어진다. 이수진 의원은 ‘친일파 파묘 법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학계나 시민사회에서 토론할 문제를 의회로 가져와 다수결로 처리하겠다는 얘기. 이러다가는 총선 결과에 따라 매번 시신을 파냈다 묻었다 하는 소동이 벌어질 게다. 왜 그럴까. 척결하겠다는 ‘토착왜구’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다 보니 무덤에서 죽은 친일파라도 꺼내 보여줘야 했던 것이리라.
국회 운영도 전투적이다. 오랜 관행을 깨고 법사위원장을 가져갔다. 자기들이 “절대다수”라서 그런단다. 그걸 승자의 당연한 권리로 보는 것이다. 그러는 자기들은 과거에 81석의 절대소수로 그 자리를 양보 받은 바 있다. 원래 전쟁터에 패자를 위한 배려란 없는 법. 나머지 위원회도 모두 가질 태세다. 그들의 1호 법안(‘일하는 국회법’)엔 국회심의에서 다수결을 한층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당은 군대조직 같다. 금태섭 의원은 당과 다른 의견을 냈다고 징계를 받았다. 의원 개개인이 독립적 헌법기관이라는 자유주의적 인식은 없다. 당 대표가 의원들에게 함구령까지 내린다. 그 덕에 윤미향 사건처럼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우리는 의원 개개인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의원들은 176대의 거수기, 다수결 무기로 전락했다. 의원보좌관 뽑는 데에는 출신성분을 본단다.
◇흔들리는 삼권분립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 남은 것은 검찰과 법원. 자기들이 세운 검찰총장을 공공연히 “공수처 대상 1호”로 꼽는다. 한 어용교수가 총장에게 거취를 정하란다. 왜? “총선에서 집권당이 과반을 넘는 일방적 결과”를 낸 것이 이유란다. 사법부도 무사하지 못하다. 이수진 의원은 법정에서 제게 불리한 증언을 한 판사를 “법관탄핵 1순위”로 꼽았다. 사법부를 향해 승자의 위력을 과시한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 최강욱 의원의 말엔 승자의 오만이 철철 묻어난다. 검찰 소환에 불응하더니 재판 도중 바쁘다고 일어난다. 이 완장 문화 역시 슈미트의 관념과 관련이 있다. 삼권분립의 목적은 권력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에 있다. 반면 전쟁의 목적은 이와 달리 힘의 균형을 깨고 적을 정복하는 데에 있다. 그에게 사법부는 선거로 정복한 영토일 뿐이다.
물론 이 시대에 나치 시절처럼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시스템에 머물며 안에서 그것을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금 민주당에서 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문제는 이 행태가 시민의 자유주의적 권리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요즘 민주당 안에선 자유주의 정당에선 생각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양향자 의원은 ‘역사왜곡금지법’을 발의했다. 국가보안법 대신에 민족보안법이 등장한 것이다. 정청래 의원은 ‘악의적’ 보도를 막아줄 ‘언론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겠단다. 문제는 그 ‘악의’를 누가 판단하느냐다. 칼 슈미트는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총통의 비상대권에 관해 “언제가 비상인지 결정하는 자, 주권은 그에게 있다.”고 했다. 무엇이 ‘악의’인지 판단하는 자, 언론은 그자의 입이 될 것이다.
◇공격받는 자유주의 ?
그 영향은 시민의 삶에까지 미치고 있다. 한 청년은 대학에 대통령 비판 대자보를 붙였다고 기소 당했다. 나 역시 페이스북에 올린 글로 친여 시민단체에 고발당했다. 정의연을 비판한 이용수님은 민주당 지지자에게 모욕당했다. 한 여성은 제 페이스북에서 유시민을 비판했다가 적발돼 노무현재단에서 해고당했다. 내가 아는 한 기자는 조정래를 비판한 한 줄의 문장 때문에 원고를 거절당했다.
비판적 기사를 쓴 기자에게는 언어폭력이 쏟아진다. 그 이름이 ‘기레기 리스트’에 실려 가족까지 신상이 털린다. 대낮에 방송사 기자가 테러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선동가의 말 한마디에 방송사 취재팀이 날아간다. 음모론 방송과 사기꾼 인터뷰도 방관하는 방통심의위가 멀쩡한 보도에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제재를 가한다. 윤건영 의원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사를 쓴 기자는 사표를 써야 했다.
K-방역 세계정복의 ‘국뽕’에 취해 이 나라는 자랑스런 “문재인 보유국”이 되었다. ‘문광소나타’가 청와대 입장권이 된다. 국민의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욕이라도 달게 먹겠다던 노무현의 나라는 이제 없다. 지나가는 한마디에 청와대 참모들이 총폭탄이 되어 결사옹위에 나선다. 대통령은 태종이 되고, 조국은 조광조가 된다. 물 티슈로 세차에 나서는 개인숭배도 자유주의 국가엔 낯선 광경이다.
한겨레신문은 “김정숙씨”라고 했다가 혼났고, 한 개그맨은 대통령을 ‘문재인씨’라 불렀다고 곤욕을 치렀다. 한 기자의 푸념이다. “노무현을 왜 지지하냐고 물으면 권위주의 타파라고 답한다. 왜 이명박을 지지하냐고 물으면 경제분야 능력이 뛰어나서, 왜 박근혜를 지지하냐고 물으면 아버지처럼 잘할 것 같아서란다. 그런데 문재인을 왜 지지하냐고 물으면 ‘문재인이 니 친구냐’는 반응이 나온다.”
◇낯익은 낯섦
정치가 ‘피아구별’로 이해되고 민주주의가 ‘다수결’로 환원될 때, 30년대 독일처럼 민주주의는 반대물로 전화한다.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정신상태와 감정구조가 많은 이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당연하다. 지금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의 자유주의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꽤 낯익은 것이다. 그것은 운동권 시절 586세대가 공유했던 전체주의 문화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낯익은 낯섦을 ‘언캐니’(uncanny)라 부른다. 이 정권은 언캐니하다. 자유민주주의인 듯 낯익으면서 민중민주주의인 듯 낯설다. 그래서 밤에 보는 인디언 인형처럼 가끔 섬뜩하게(uncanny) 느껴진다.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30가지 약속을 했다. 점검해보니 그 중 29가지를 어겼다. 지킨 것은 딱 하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 나라를 우리는 눈앞에서 본다.
칼 슈미트의 민주주의, 다수결로 환원된 민주주의는 ‘공공선’의 공화주의 이념을 파괴하고, 소수의 존중이라는 자유주의 원칙을 말살한다. 이 두 가치를 포기한 민주주의는 자살한다. 기억하라. 히틀러는 43.9%의 지지로 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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