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남부군'과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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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가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서 들려드립니다. 한국일보>
“우리가 사는 사회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지식인의 자세다. 그런데 영화로 그것을 표현하는 감독이 많지 않으니까 내가 하는 거다.”(국제신문 2019년 11월 19일 자)
정지영(74) 감독이 영화에 눈을 뜬 건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책과 친숙했던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이범선 작가의 단편소설 ‘오발탄’을 읽은 후 영화잡지를 통해 각색된 시나리오까지 접하게 된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을 직접 보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5ㆍ16 군사정변이 있은 후 상영 금지 조치를 받은 영화는 2년 뒤에 재개봉했는데, 글로 읽으며 펼치던 상상의 나래가 스크린 속에서는 뚜렷하고 생생한 이미지로 떠오르고 있음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오발탄’을 보고 나서야 영화를 단지 ‘보는’ 것이 아닌 ‘읽게’ 되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전후 시대의 음울한 사회상을 그린 이 영화는 이념과 사회문제를 즐겨 다루는 그의 작가적 성향에 큰 영향을 남긴다.
'오발탄'에 빠졌던 고교생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은 정 감독은 어느 대학 영문과에 지원했다가 두 번 떨어진 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지원해 과수석으로 합격한다. 그러나 이 당시 대학의 교육 환경은 실로 열악한 것이어서 “2,3학년들은 물론 심지어 4학년들도 이론만 배울 뿐 실질적인 기자재 활용은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당장 영화 찍고 싶은 사람 붙들고서 따분한 이론만” 가르치는 현실에 회의를 품게 된 그는 고려대 불어불문학과로 편입한다.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 영화 이론 공부는 독학이면 충분하리라 여겼고, 프랑스 영화와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정지영은 문예영화의 대가 김수용 감독의 ‘내일은 진실’(1975)의 연출부로 충무로에 첫 발을 내딛는다. 원래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만추’(1966) 등을 만든 이만희 감독의 연출부에 지원했지만 ‘삼포 가는 길’(1975) 촬영 도중 이 감독이 돌연히 세상을 떠나면서 무산되었고, 김 감독의 현장에 조감독으로 가 있던 지인 차현재의 권유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황토’(1975)에선 스크립터를 맡은 정 감독은 이후 ‘가위 바위 보’(1976), ‘화려한 외출’(1977), ‘망명의 늪’(1978)과 ‘사랑의 조건’(1979) 등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하얀 미소’(1980)와 ‘저녁이 우는 새’(1982)의 각본을 맡아 쓰기도 했다.
미스터리물로 데뷔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로 정 감독은 꿈에 그리던 연출 데뷔를 한다. 배우 오수미와 정상급 패션모델이었던 윤영실 자매가 출연하고 이들의
상대역으로 신일룡이 나선 이 영화는 ‘애마부인’(1982)이 일으킨 에로영화 신드롬에 일정부분 기대고 있었으나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1960)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영화에 미스터리 스릴러의 구조와 기법을 가미했고, 사치스러운 미장센을 통해 성 상품화와 소비주의로 물들던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고자 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이 낳은 파장은 이혁수 감독의 ‘여자는 비처럼 남자를 적신다’(1983)나 노세한 감독의 ‘여자의 대지에 비를 내려라’(1985) 같은 아류작으로 이어졌으며, 이 작품부터 ‘여자가 숨는 숲’(1988)까지 정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상업 멜로물에 치중하며 대중의 호응을 얻는 흥행 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내가 변해서 ‘남부군’(1990)을 만든 게 아니라 세상이 변했다. 1987년 6월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정치, 경제, 자유, 문화 등 모든 것이 변한 시점인 동시에 민주화가 시작된 시기다. 1988년 출간된 이태의 ‘남부군’을 읽으며 영화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국민이 뒤에서 지지해주고 있다고 믿었기에 제작할 수 있었다” (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마스터클래스 중)
제작 기간 3년에 엑스트라 연인원 3만명에 달하는 대작 ‘남부군’은 정지영 필모그래피의 변곡점이었다.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반공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빨치산을 이념에 경도된 집단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 존재로 조명했고, 반세기 가까이 영화계에 만연해 있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깬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남부군’은 서울관객만 37만명에 달하는 흥행을 거두었다. 빨치산이 토벌군을 격퇴시키는 장면에서 극장 안의 고등학생들이 박수를 친 일화를 낳을 만큼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남부군’의 촬영이 진행 중이던 1989년 9월 3일, 정 감독은 경북 포항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된다. 1988년 영화법 개정으로 할리우드 영화의 국내 직접배급이 허용되자 첫 직배영화였던 ‘위험한 정사’(1987)가 상영 중이던 코리아극장과 신영극장에 뱀을 풀어놓을 것을 교사한 혐의였다. 극장 측에서는 이 사건을 함구하고 있다가, 뒤에 일어난 화재사건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공식화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 감독은 10월 24일까지 복역하다 보석으로 풀려 나왔고, 바로 현장에 복귀해 영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 당시 직배 저지 투쟁의 상황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의 일부 장면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현대사의 금기에 다가가다
‘하얀 전쟁’(1992)는 ‘남부군’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한 번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치부를 드러낸 논쟁작이었다. 안정효 작가가 쓰고 영문 번역돼 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원작을 거머쥔 정 감독은 20억원이라는 대작급 예산에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 말살,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이 겪는 후유증과 황폐해진 내면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유진영을 수호하기 위한 반공 성전‘의 명분과 전쟁 특수의 이면에 가려져 왔던 베트남전 참전의 역사를 반성과 자기성찰을 담아 돌아본 이 영화는 ‘32만 파월용사의 긍지와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전우회가 공연윤리위원회에 일부 장면의 삭제를 요구하는 해프닝을 빚었지만, 1992년 제5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대상과 최우수 감독상을 받는다.
‘블랙잭’(1997)과 옴니버스 영화 ‘까’(1998)가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실패를 기록하면서 정 감독의 경력은 긴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명필름 제작으로 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아리랑’을 8년간 추진하다가 좌초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배우 문성근이 ‘판사석궁 테러사건’의 실화를 다룬 르포를 감독에게 건네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사법부와 일반 국민 간에 놓인 괴리를 바라본 ‘부러진 석궁’(2011)은 346만 관객을 넘기며 13년만에 복귀한 노감독 정지영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사회파 리얼리즘의 대가 정지영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 후에도 정 감독은 김근태 의원이 당했던 고문 실화를 재현한 ‘남영동 1985’(2012), 론스타 게이트를 배경으로 한 ‘블랙 머니’(2019)를 연출하고,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2013)를 제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한국의 사회적 이슈에 민감히 반응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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