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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치··· 장군이 포로 되다

입력
2020.07.30 04:0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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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

편집자주

삶의 뿌리가 통째로 뽑힌 동족상잔의 비극이 꼭 70주년을 맞았다. 임진왜란, 6.25전쟁 등 한반도 격전지 답사에 천착해온 한국일보 출신 원로 언론인 문창재 칼럼니스트가 알려지지 않은 6.25 비극을 6회로 나눠 싣는다.


대전역에 내려 전선으로 떠나는 미 24사단 병사들 . 자료사진

대전역에 내려 전선으로 떠나는 미 24사단 병사들 . 자료사진

한강방어선을 뚫기에 또 사흘을 허비한 인민군은 7월 3일 전차를 앞세우고 남진을 시작했다. 한강방어선에 총력을 쏟은 국군은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하고 도쿄로 돌아가자마자 맥아더 장군은 본국에 긴급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규슈 고쿠라(小倉) 주둔 스미스 부대를 한국전선에 급파했다. 뒤이어 24사단 본대를 파견하면서 그는 “시급한 것은 6일 간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인민군 남진을 저지시키라고 항공편으로 보낸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선전투에서 참패했다. 뒤따라온 미24사단 역시 평택-안성저지선, 천안저지선, 금강저지선에서 차례로 밀려 ‘대전 사수’가 급선무가 되었다. 워커 8군사령관은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에게 7월 20일까지 대전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포항에 상륙할 해병1사단을 추풍령 전선에 배치할 시간을 벌어달라는 것이었다.

야크기 지원을 받은 적 제3, 제4사단이 경부축선을 따라 밀물처럼 치고 내려왔다. 교통의 요지인 대전은 옥천 유성 논산 금산 조치원 등 5개 지역으로 분기되는 도로망을 갖고 있어 수비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딘 장군 요청으로 최신형 대전차포가 왔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병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병력부족에 지리가 어둡고 훈련되지 않은 부대는 지휘관들까지 앞에 나서야 할 상황을 초래했다. 천안전투에서 34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이 전사하자, 딘 장군은 바주카포를 메고 일선으로 달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용명을 떨친 이 포병 전문가는 직접 바주카포를 쏘아 적 전차를 파괴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병력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전차를 앞세우고 대전시내로 들이닥쳤다.

대전지구 전적비 대전시 제공

대전지구 전적비 대전시 제공


시가지 혼전 중에 그의 사단은 통신장비마저 불통되어 부대 간 연락이 끊겼다. 원래는 지연작전이 19일 밤까지로 예정되었지만, 하루가 연장되었다. 20일 악전고투 끝에 연락병을 투입해 철수명령을 내린 딘 소장은 인접 병력을 모아 50여대의 차량 편으로 철수 길에 나섰다.

바로 이 때 돌이키지 못할 실수가 발생했다. 운전병이 옥천-영동 방향으로 좌회전해야 할 길을 지나쳐 남쪽으로 계속 달린 것이다. 그리고 곧 첫 번째 위기가 닥쳤다. 길가에 매복했던 적의 공격으로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딘은 몇 사람의 대원과 함께 산속으로 피했다. 그 중에 부상병이 포함되었다.

부상병이 심한 갈증을 호소하자 딘은 물을 찾아 계곡 아래로 내려가다 아래로 굴러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기다리다 지친 대원들이 떠나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은 그는 혼자 산야를 헤매었다. 그러다가 역시 혼자가 된 동료를 만나 함께 행동했다. 산짐승이나 다름없는 도피생활이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 별자리를 보고 동쪽으로 간다는 게 제자리를 뺑뺑 돈 적도 있었다. 허기를 달래려고 밭에 버려진 날감자를 먹고, 갈증이 나면 빗물을 마셨다. 그게 탈이 되어 심한 이질을 겪기도 했다.

인민군 포로가 되었던 딘 장군 . 자료사진

인민군 포로가 되었던 딘 장군 . 자료사진

그러다가 천사를 만났다. 전북 무주군 적상면 한 농가에 들어가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자, 집주인(박종구)은 음식을 차려주고 정성스레 돌봐주었다. 그 집에서 이틀 밤을 자고 길을 나섰다가 악마를 만났다. 키 작은 중년 남자 둘에게 대구까지 길 안내를 해 주면 100만환(1,000달러 상당)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들은 “오케이!”를 연발했다. 그들을 따라가다가 10여명의 청년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불문곡직 딘을 결박해 진안군 어느 파출소로 끌고 갔다. 미리 신고를 했던 모양이다.

포로가 된 딘은 전주를 거쳐 대전으로 압송되었다가 평양으로 끌려갔다. 국군의 북진 때는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江界·평북)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포로 신문과정에서 신분을 감추느라 심한 고초를 겪었다. 44시간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도 당했다. 90㎏ 가깝던 거구가 58㎏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 통역자는 도쿄유학을 다녀와 김일성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던 고 이규현(李揆現·문공부장관 역임)이었다. 그는 국군 북진 때인 1950년 10월 미군부대에 투항해 자유인이 되었다. 언론계(한국일보논설위원·중앙일보편집국장)에 종사하다가 문공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그에 따르면 딘은 인민군 정치보위부장 방학세의 직접 심문까지 받았지만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 인천상륙작전 비밀을 지키려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분이 탄로되었다.

전투가 끝난 뒤 인원점겸을 하는 미24사단 장병들 . 자료사진

전투가 끝난 뒤 인원점겸을 하는 미24사단 장병들 . 자료사진

사단장이 실종되자 미군은 바로 그날 구출작전에 나셨다. 미국 역사상 처음인 불명예를 씻으려는 담대한 행동이었다. 33명으로 구성된 결사특공대는 열차편으로 대전역에 돌입했다. 역 가까이 어딘가에 고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었는데, 그게 착각이었다.

대전외곽 세천 터널 일대에 배치된 적 매복조의 집중사격을 받아 10여 명이 전사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대전역에서 1시간 가까이 수색전을 펴다가 퇴각 중 또 공격을 당해 대원 20여명과 기관사 김재현이 전사했다. 특공대 전원 사상(33명 전사, 1명 중상)의 참패였다. 사단장 실종, 연대장 전사, 부대전력 40% 망실, 특공대 전원 사상이라는 비참한 기록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치욕이었다. 특히 사단장 실종이 뼈아팠다.

미군병사들이 왜 그렇게 허약했는지, 그것도 미스터리의 하나였다. 아무리 훈련되지 않은 병력이라 해도 며칠 사이 그렇게 괴멸된 것은 누구라도 의아해 할 일이다. 군사전문가들은 당시 극동주둔 미군의 정신적 해이에서 원인을 찾는다.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들. 자료사진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들. 자료사진

주한 미군고문단 하우스만 참모장은 미 24사단 병력을 ‘도쿄 긴자 거리에서 게이샤들과 즐거운 외출 시간이나 갖던 부대’라고 평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 평화무드에 안주한 일본주둔 미군의 군기는 풀릴 대로 풀려 있었다. 전투경험자는 부대원의 15%에 불과했고, 교육훈련도 형식적이었다. 세계최강 군대라는 헛된 자긍심에만 부풀어 있었다.

막상 전투상황에 닥치자 사병들은 몸을 사렸다. 조그만 실수에도 우왕좌왕했다. 최신 대전차포가 공수돼 왔지만, 다룰 줄 아는 병사가 드물었다. 며칠 사이에 통신이 두절된 것도 비슷한 사정이었다.

딘 장군 생존사실은 1951년 12월 18일 오스트레일리아 종군기자 월프레드 버체트의 인터뷰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에 들어가, 어느 이층집에서 딘 장군을 만났다. 딘이 북한 사병과 장기를 두는 사진을 곁들여, “딘 장군은 스위스의 휴양지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북한이 왜 자신을 선택했고, 왜 딘 장군을 노출시켰는지, 그 의도에 눈감고 특종에만 급급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딘 장군은 1953년 정전 후 포로교환 때 인민군 총좌 이학구(李學九)와의 교환형식으로 풀려났다. 꺼칠한 몰골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으로 귀환한 그는 지나친 ‘영웅대접’을 민망해 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사람의 포로에 불과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딘 장군의 철수로

딘 장군의 철수로

그는 한국전선에 3.5인치 대전차포를 처음 들여온 사람이다. “지금 곧 3.5인치 대전차포를 보내달라고 전문을 보내줘. 포트 베닝 기지(조지아 주)에 여분이 있을 테니까. 오늘 2.36인치 포를 쏴봤는데 적 전차가 끄떡도 하지 않아.” 이 부탁을 받은 하우스만의 급전으로 그 전차포가 공수되어 주한미군에 긴급히 배치되었다. 한국군 사단에도 대전차포 중대가 하나씩 배속되어 낙동강 방어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1947년 제2대 주한 군정장관 겸 주한미군부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제주 4·3 사건 진압 지휘자였다. 1948년 5월 5일 제주에 날아간 그는 진압 대책회의를 주재하다가,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과 김익렬(金益烈) 9연대장의 충돌을 정리하고 강경진압으로 방향을 잡았다. 평화적 해결을 주장한 김 중령이 강경책 일변도의 조 부장 멱살을 잡고 흔들어 육탄전이 벌어지자, 헌병을 동원해 그를 끌어냈다.

미군정 시대 그의 강경정책에는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다 접어두고, 6·25 때 그가 수모를 당해가면서 경부축선을 지켜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공이다. 그와 그의 사단이 없었으면 낙동강 방어선도 제몫을 못했을 테니까.

문창재 칼럼니스트(전 한국일보 논설실장)

필자는 2004년 한국일보 논설실장으로 퇴직한 후 내일신문 객원논설위원을 거쳐 올해 3월까지 논설고문으로 일했다. 저서에 '정유재란 격전지에 서다' '증언(바다만 아는 6.25 전쟁비화)' '나는 전범이 아니다' 등 10여권이 있다.

<글 싣는 순서>
(1) 인민군은 왜 서울에서 사흘을 머뭇거렸나
(2) 해주점령 오보의 파장과 영향
(3) 남진을 주춤거린 동해안 축선
(4) 대통령 떠난 뒤 ‘서울사수’ 방송
(5)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
(6) 이형근 장군이 본 10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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