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소집 신청 잇따르는 수사심의위
미국 대배심 참고해 만들었지만 '수박 겉핥기' 지적
법적 구속력 갖도록 근거 마련 등 실질적 보완해야
편집자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 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한국일보>
2016년 5월 19일 서울남부지검 형사2부 소속 김홍영(당시 33세) 검사가 업무 스트레스와 상사(부장검사)의 폭언ㆍ폭행을 견디다 못해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상사는 징계만 받고 검찰을 떠났다. 형사처벌은 없었다. 그로부터 4년 4개월이 흐른 지금, 세간에서 잊혀진 이 사건이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해 11월 해당 상사를 고발했던 김 검사 유족과 변호인이 지난달 14일 “대검찰청 검찰수사심의위원회(수사심의위) 소집을 신청하겠다”고 밝힌 탓이다.
이번 수사심의위 소집 신청은 사건 처리에 미온적인 검찰을 상대로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는 취지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의 수사 방향 및 결론을 논의했던 종전 수사심의위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게다가 최근 검찰은 수사심의위 의결을 잇따라 따르지 않는 모습마저 보였다. 수사심의위 제도의 효용성을 둘러싼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또 다시 ‘소집 신청’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무제한 토론’ 가능한 美 배심제 모델
수사심의위는 현 정부 들어 ‘검찰 개혁’ 요구가 거세지자 2018년 1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 시절, 검찰 스스로 마련해 도입한 제도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주요 사건들에 대해 각계 전문가 및 시민들로 구성된 수사심의위가 검찰의 수사 계속 여부 등을 판단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사정에 밝은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주요 수사에 대한 정치권 등의 외풍을 차단하는 것은 물론, 검찰 내부적으로도 이견이 많은 사건과 관련해 갈등이 극심해지는 걸 막아내고자 고심 끝에 만든 장치”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수사심의위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배심원 제도를 모델로 하고 있다. 배심제는 무작위 차출된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재판 또는 기소 과정에 참여해 평결토록 하는 것인데, 현대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제도로 평가된다. 헨리 폰다 주연의 미국 고전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1957)에는 그 이유가 정확히 설명돼 있다.
영화의 주된 내용은 평소 가정폭력을 일삼던 부친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 10대 아들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 12명의 시민이 평결에 앞서 나누는 마지막 토론이다. 먼저 재판관은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평결을 내려야 한다. 이제 여러분의 임무는, 앉아서 사실과 허구를 구분해 내는 것이다.” 6일간 재판을 지켜본 배심원들은 결론을 내리기까지 갇혀 있는 상태에서 ‘무제한의 시간’ 동안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
놀라운 대목은 논의 시작 땐 11대 1로 유죄 의견이 압도적이었던 배심원단이 결국에는 ‘만장일치 무죄’ 판단을 내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뒤집기’가 가능했던 건 배심원들이 검사가 제시한 증거와 증인들의 증언을 하나하나 면밀히 검증하고 토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초 소년의 무죄를 의심했던 배심원 한 명은 검사의 주장과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 뒤, 검사가 “살해 도구로 쓰인 증거”라고 제시했던 흉기와 살해 현장의 건축도면 등의 제출을 요구한다. 법원 직원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안고 증거 물품과 참고 자료를 제공한다.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위해 상당한 권한이 보장되는 셈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심제는 정확히 말하자면 ‘소배심’이다. 미국의 배심제는 대배심과 소배심으로 나뉘는데, 형사사건 대배심은 배심원 16~23명이 비공개로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 등을 심사해 피의자 구속 및 기소 여부를 판단한다. 사실상 검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직접 범죄를 조사할 권한도 주어지고, 결론을 만장일치로 낼 필요는 없다. 반면, 배심원 12명으로 형사 사건 소배심은 공개 재판에서 검사로부터 최종 증거 자료를 제출받아 심리하고, 기소 내용과 피고의 변론을 모두 들은 뒤 만장일치로 유ㆍ무죄 여부를 판단한다. 판사 역할인 셈이다.
심의위서 ‘충실한 검토’는 불가능
한국의 수사심의위는 기본적으로 미국 대배심을 토대로 하면서도, 검사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입장을 듣는 소배심의 속성도 일부 포함한 제도다. 그러나 형식적 유사성은 있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배심제와 상당히 다르다는 평가가 많다. 법령상 근거가 없어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게 대표적이다. 검찰이 의결을 따르지 않더라도 제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는 결국 최근 검찰이 잇따라 심의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 사태를 부르기도 했다. 지난 7월 말 이른바 ‘검언유착’ 의혹 수사팀이 수사심의위 권고(한동훈 검사장 수사중단ㆍ불기소)를 어기고 한 검사장 압수수색을 강행하다 ‘검사 육탄전’ 사태(7월 23일)가 터졌다.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을 받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서도 검찰은 수사심의위의 ‘불기소’ 의결과는 달리, 지난 1일 그를 결국 기소했다. 수사심의위 무용론이 제기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무제한의 시간’을 보장하는 미국의 배심제와는 달리, 한국에서 수사심의위원들이 사건 내용을 충실히 검토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검언유착 의혹 수사심의위는 검찰과 이동재 전 채널A 기자, 한동훈 검사장, 이철 전 밸류인베스트코리아(VIK) 대표 등으로부터 A4 용지 30쪽 분량의 의견서를 제출받았다. 각각 40여분씩의 의견을 청취한 뒤 토론을 거쳐 당일 최종 의결을 내놨다.
이 부회장 사건 수사심의위도 마찬가지다. 검언유착 의혹 사건과 비교해 사건 관계인이 적어 당사자 의견 청취 시간이 좀 더 길긴 했지만, 이 사건 수사기록이 무려 21만여쪽인 점을 감안하면 범죄 사실과 증거 관계를 면밀히 따져볼 수 없었다는 말이다. 수사심의위가 사건 내용을 검토하는 건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도 ‘여론 재판’으로 흐를 소지가 많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이유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수사심의위는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구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면서도 “한계를 보완하는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사문화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수사심의위 결정이 법적 구속력을 갖도록 법률로 근거를 만들고, 심의위원들이 충분히 사건을 검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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