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왕실의 꽃 모란
편집자주
여러분처럼 조선의 왕이나 왕비도 각자 취향이 있었고 거기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 에 격주로 토요일에 소개합니다. 한국일보>
꽃은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예부터 즐겨 구경하는 대상이 되어 왔으며, 꽃들이 가진 각색의 형상과 생태적 특성을 사람의 성향이나 덕목에 빗대는 식으로 은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해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내는 모란 역시 독보적인 크기의 꽃송이와 화려하고 풍성한 자태로 인해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간주되어왔고, 또한 ‘꽃 중의 왕’(花王)으로 칭송될 정도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모란은 중국이 원산지로, 6세기 무렵 재배 식물로 가꾸기 시작해 당(唐)나라 때 크게 유행했다. 한반도에 전해진 것도 당나라 연간인 신라 진평왕 대로 알려져 있다. 모란의 재배와 감상이 가장 성행했던 것은 고려 시대였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현종(顯宗ㆍ재위 1009~1031년)이 대궐 안에 직접 모란을 심었다는 기록과 함께 국왕들이 궁궐 안에 핀 모란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시를 짓게 했다는 기사가 다수 전해져 고려 시대 모란 애호 분위기를 전해준다.
고려 후기의 문장가였던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년)가 지은 ‘여러 사람이 지은 산호정 모란 시에 차운하다(次韻諸君所賦山呼亭牡丹)’라는 시에는 “대궐 안 산호정에 모란이 한창 피면 이를 읊는 사람이 많아 백 수(首)에 이른다”라는 구절이 있어 당시 군신이 함께 모란을 감상하고 여기에 시를 붙이며 즐기던 문화가 성행했음을 알려준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어도 모란 애호의 풍조는 계속되었다. 태종(太宗ㆍ재위 1400~1418년) 대에는 광연루(廣延樓)에서 상왕인 정종(定宗)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함께 모란을 감상하고 타구(打毬)하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태종 대 창덕궁 후원에 건립된 광연루는 외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거나 종친들을 불러 잔치를 열고 함께 활쏘기나 격구를 하는 등 여흥을 위한 공간이었다. 태종은 여기에 못을 조성한 후 못 안팎에 연꽃과 함께 모란을 길러 감상하며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꽃에 취미를 가졌던 연산군(燕山君ㆍ재위 1494∼1506년)은 모란에도 각별한 취향을 보였다. 신하들에게 모란꽃을 내려 관련된 시를 지어 바치도록 했으며, 팔도 관찰사에게는 “도내의 모란이 있는 곳에서는 꽃 필 때에 품종이 좋은 것을 가려서 표를 세워 두었다가 가을이 되거든 봉진하라”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
성종(成宗ㆍ재위 1469∼1494년)도 재위 13년 입직한 당상관과 홍문관, 경연관 신하들로 하여금 모란을 주제로 시를 쓰게 한 일이 있었다. 당시 홍문관 교리였던 김흔(金?ㆍ1484~1555년)의 문집에는 왕이 내린 시제를 받아 쓴 ‘모란 족자에 붙임(題牡丹障子)’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어 임금과 신하 간에 모란 그림을 감상하며 시를 지어 함께 즐겼던 단편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요와 사치보다는 검약을 강조했던 유교 문화 속에서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을 감상하고 즐기는 문화는 권장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효종(孝宗ㆍ 1649∼1659년) 대 정승 이시백(李時白ㆍ1581~1660년)의 집에 모란꽃이 활짝 피었다는 소식에 효종이 이를 구하려고 하자, 이시백이 임금을 보필하는 자가 되어 이목을 즐겁게 하는 물건으로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그 나무를 베어 버렸다는 일화는 모란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 인식을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양과 도상(圖像)으로서 모란은 꾸준히 사랑 받았다. 조선 후기 김수장의 “모란은 화중왕(花中王)이요 향일화(向日花)는 충신(忠臣)이로다…”로 시작하는 시조가 보여 주듯이 화왕, 즉 꽃 중의 왕으로서의 모란이라는 상징은 널리 공유되었다. 더 나아가 현실 세계의 지존, 즉 국왕과 왕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외연이 확장되었다. 조선 시대 국왕과 왕실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모란이 사용된 것은 궁중에서 사용되었던 ‘모란병(牡丹屛)’을 통해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왕이 자리하는 곳마다 설치되어 왕의 권위를 나타냈던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처럼 모란 병풍은 궁궐 내 왕과 왕비의 공간을 장식했고, 궁중에서 행해지는 각종 의례에 두루 사용되며 왕실의 지엄함을 상징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모란 병풍이 다수 전해지는데, 병풍 속의 모란 그림은 그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정형화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줄기는 수직축을 이루며 뻗어 나갔고, 그 좌우로 꽃송이가 번갈아 배치되었다. 동일한 형태를 매 폭마다 반복적으로 구성하여 장식성을 극대화했다. 화려하면서도 정돈된 형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숙한 분위기로 인해 왕실 의례의 위엄과 왕실의 권위는 더욱 강조되었다.
모란 병풍은 특히 왕실의 조상을 섬기는 의례에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국왕이나 왕비 등이 상을 당하면 우선은 시신을 궁궐 내 빈전(殯殿)에 안치하고, 이후 시신은 능을 마련하여 봉안하며, 그 혼을 담은 신주(神主)는 다시 궁으로 모셔와 궁궐 내 혼전(魂殿)에 안치하여 3년 상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3년 상을 마치면 신주를 종묘(宗廟)로 옮겨 봉안함으로써 왕업을 돌보는 왕실의 조상신으로 모시게 된다.
이러한 흉례의 전 과정과 종묘에서 행하는 친제(親祭) 의례에서 모란 병풍은 필수로 사용되었다. 특히 빈전에 시신을 안치하고 있을 때나 시신을 능에 봉안하는 과정에서 관이 정자각(丁字閣)과 능상각(陵上閣)에 잠시 머무를 때면 그 주위에는 반드시 모란 병풍을 둘러쳤다.
능에서 돌아와 종묘에 봉안하기 전까지 궁궐 내에서 신주를 모시던 장소인 혼전(魂殿)에는 생전의 국왕의 자리와 마찬가지로 신주를 둘러싸고 일월오봉병을 세우고, 그 뒤의 북쪽 벽에는 매 칸마다 모란 병풍을 설치했다. 시신이나 혼을 담은 신주가 자리하는 곳 어디에나 모란 병풍을 설치하여 고인의 존재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를 시위(侍衛)하도록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이 조상에 대해 지극한 정성을 보인 장소로 역대 국왕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례를 지냈던 진전(眞殿)을 빼놓을 수 없는데, 여기에도 모란병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1776년 영조(英祖ㆍ재위 1724~1776년)가 궁궐 내 어진을 봉안한 곳에 들러 수리를 명하면서 “대궐 안에 어진을 봉안하는 어탑 뒤에는 으레 모란 병풍이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어진 봉안처에 모란병을 배설하는 것이 이미 법식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통은 대한제국 때까지 지속되어, 1901년 고종이 태조를 위시한 7대조의 어진을 모사하도록 하고 이를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내 흥덕전에 모시면서 모란 병풍을 배설하도록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21년 건립된 창덕궁의 신선원전(新璿源殿)에서는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선원전에는 각 감실마다 어진이 위치하는 자리를 둘러싸고 일월오봉도 그림을 삼면에 두르고, 뒤쪽 벽에 모란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는 혼전에서 신주를 일월오봉병으로 둘러싸고 뒷벽에 모란병을 배설한 것과 동일한 구조이다. 감실 입구 기둥과 보 주변에도 모란꽃 모양을 조각하여 장식을 더했다.
이처럼 조상을 섬기기 위한 의례와 공간을 모란 도상으로 장식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동시에, 부귀와 풍요 등 모란의 기복적 의미를 빌어 조상의 가호 속에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던 것이다.
매해 봄이면 창덕궁이며 덕수궁 등 조선시대 궁궐 곳곳에는 모란이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그러나 모란 문양이 고유의 양식으로 왕실을 상징했던 맥락은 흩어지고, 모란을 감상하며 시를 읊던 풍류도 찾을 수 없다. 내년 봄 어김없이 궁궐을 수놓은 모란과 다시 조우하게 되었을 때, 잠시나마 옛 사람들이 모란을 완상하던 풍경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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