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의 건축 연도는 1928년과 2002년이다. 건물 내부와 입면의 나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1928년 경성재판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다. 해방 이후에도 1989년까지 법원으로 사용되다가 시청별관을 거쳐 미술관이 됐다.
하지만 법원 건물은 미술관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재건축 수준의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실내 공간은 바뀌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정동 거리를 마주하고 있는 건물 입면은 남겨두었다. 2002년 5월, 미술관으로 변신한 건물 안에서는 최신의 현대미술작품이 전시되지만, 남겨진 입면은 건물의 역사를 웅변하며 정동 거리와 어우러진다. 서울시립미술관을 선례로 명동국립극장과 서울시청이 입면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지어졌다.
새로운 쓰임에 걸맞게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면서도 오래된 입면을 남긴 것은 건물의 입면이 거리와 도시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예 새로운 입면을 만들어 거리 전체의 건물을 덧씌우는 방식이 시도되기도 한다.
2005년, 인천 중구청은 구청 앞 거리의 건물 입면에 짙은 갈색의 나무판을 덧씌웠다. 그 거리는 개항과 함께 만들어진 거리로 일본인이 모여 살던 조계지였다. 침체된 거리 활성화를 고민하던 중구청은 거리의 오랜 역사와 경관을 내세우기로 했다. 일본풍 거리 분위기를 내기 위해 거리에 접한 모든 건물에 짙은 갈색 나무판을 덧대었다. 그렇게 진짜 일본식 건물은 가짜 나무판에 가려졌고, 평범한 건물들도 나무판을 뒤집어쓰고 일본식 건물인 척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한번 만들어진 사례는 전국으로 퍼졌다. 일본식 건물이 모여 있는 곳, 그리고 그 거리를 관광지로 만들길 원하는 지자체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짙은 갈색의 나무판이 건물을 덮었다. 그렇게 군산에, 영산포에, 구룡포에 갈색 옷을 입은 건물이 생겼다. 그리고 관광객이 찾아왔다.
얼마 전 울산 방어진 내진길에는 화려한 조명을 담은 철제 프레임이 건물 입면에 씌워졌다. 이는 ‘방어진 글로벌 건축문화거리 조성 사업’, ‘방어진항 건축물 입면 디자인 개선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상가 입면을 개선해 명품거리로 조성, 방문객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 울산 동구청의 의도다. 한옥 대문을 닮은 철제 프레임이, 그리스 신전과 개선문, 돔 지붕을 닮은 철제 프레임이 건물 앞에 씌워졌다. 날이 어두워지고 불이 켜지면, 거리는 화려한 조명의 테마파크로 변신한다. 날이 밝고 불이 꺼지면, 조명에 가려졌던 철제 프레임의 초라한 민낯이 드러난다. 밤의 소비 경관을 위해 낮의 거리는 버려졌다.
건물 입면이 거리에 주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상업 거리 활성화를 꾀하려는 사람들은 건물 입면을 손대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진다. 건물 자체를 바꾸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적은 비용으로 새롭고 통일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인천 옛 일본 조계지도 비판적 시각이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은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시도였고, 옛 일본 조계지는 옛 거리의 분위기를 재현하고픈 마음이라도 있었다. 방어진은 무엇을 위해 입면을 바꾸었을까?
용역보고서에는 방어진 인근에 많은 외국인이 살고 일본식 가옥이 남아 있다는 점을 외국풍 철제 프레임 설치의 근거로 들고 있지만, 새롭게 조성된 건물 입면에서는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밖에 보이지 않는다. 상업 거리에 돈을 벌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 뭐가 나쁘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금을 들여 돈만을 좇는 거리를 만드는 걸 좋게만 볼 수는 없다. 불 꺼진 낮시간에 건물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철제 프레임들을 보고 있노라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아마도,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조명에 이끌려 그 거리를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기왕 설치된 것, 그것이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것이 또 하나의 사례가 되어 다른 지역에도 복제될까 두렵다. 성과처럼 보이는 결과물이 있고, 이를 통해 국비를 지역으로 가져올 수 있을 때, 대량 복제가 이루어진다. 정체불명의 철제 구조물에 28억원의 세금이 쓰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