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나폴레옹과 프랑스은행의 금리 밀당

입력
2021.01.18 18:06
25면
0 0
차현진
차현진한국은행 연구조정역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려울 때 도움받기 어렵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평소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의 행동 반경이 크게 줄어든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상반된 모습은 국민 신뢰도의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재정사정은 의회에 항상 보고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이 정부를 믿었다. 18세기 들어 전쟁이 유난히 많았고 그때마다 국가부채가 늘어났지만, 평화가 찾아오면 정부가 이내 세수를 늘려 국가부채를 다시 낮췄기 때문이다. 부채상환 능력을 의심받지 않는 영국 정부는 국채 발행을 통해서 전쟁비용을 여러 세대에 골고루 분담시켰다.

프랑스는 달랐다. 절대왕정은 물론이고 대혁명 이후에도 국민들이 재정사정을 좀처럼 알 수 없었다. 혁명정부는 국채 원리금을 금 대신 지폐로 갚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과 전쟁을 치를 때는 정부가 더는 국채를 발행할 수 없어서 세금에만 의존했다. 전쟁을 겪는 세대가 세금까지 더 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화폐제도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전쟁 중에 영국은 금본위제도를 잠시 이탈했지만, 프랑스는 그럴 수 없었다. 발권기관이 파산해서 화폐가 휴지조각이 되는 사태를 이미 두 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파산은 1720년 '로열은행'의 파산이었다. 왕실의 이름을 달고도 파산하는 바람에 은행(banque)이라는 말이 거짓말의 대명사가 되었다. 은행 대신에 금고(caisse)나 계산소(comptoir), 동아리(societe)라는 말을 써야 의심이 풀렸다. 그런데 대혁명 때 '발권금고'가 혁명정부에 무리하게 대출하는 바람에 1793년 또 파산했다.


나폴레옹 초상화 ⓒ게티이미지뱅크

나폴레옹 초상화 ⓒ게티이미지뱅크


1799년 11월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킬 무렵에는 화폐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이 1800년 오늘날의 프랑스은행을 세웠지만, 아무도 그 은행을 믿지 않았다. 보나파르트 가문이 그 은행의 대주주가 되고, 예금까지 맡기는 시범을 보여도 반응이 시큰둥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나폴레옹마저도 불태환화폐는 강요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앞서서 정부 불신이라는 적부터 꺾어야 했다. 그래서 만기가 도래된 국채는 무조건 금으로 갚았다. 전쟁비용은 세금을 더 걷거나 오스트리아 등 주변 점령국들에서 갹출해서 조달했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 북미 식민지(오늘날 미국 중부 15개주)까지 미국에 팔았다.

나폴레옹이 신뢰회복에 매달리는 동안 친인척들은 이권 개입에 혈안이었다. 친형 조세프부터 그랬다. 조세프는 코르시카 섬에서 자랄 때 홀어머니를 도와 코흘리개 동생들을 건사했다. 나폴레옹은 그런 형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나폴레옹을 등에 업은 조세프는 모든 이권 사업에 아귀같이 달라붙었다. 이탈리아 군납문제를 두고서는 조세핀(나폴레옹의 처)과도 다투어서 나폴레옹이 뜯어말려야 했다.

조세프와 손을 잡으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사업가들 사이에서 '만사형통'이라는 말이 나왔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돌이켜보니 형 재산이 자기 것의 세 배였다. 그 일부는 프랑스은행 대출커미션이었다.

보나파르트 형제들은 프랑스은행의 대주주로서 경영에 깊숙이 개입했다. 나폴레옹은 금리 결정에도 간여했다. 그는 프랑스의 금리가 영국보다 높은 것을 국가적 수치로 여겼다. 그래서 1806년 프로이센군을 대파한 직후 프랑스은행 총재에게 "6% 금리가 부끄럽지도 않소?"라는 한 줄짜리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총재가 당장 대출금리를 5%로 낮췄다.

이듬해 러시아군까지 격파한 뒤 다시 압박했다. "프랑스은행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오? 나는 저금리 대출로 경제를 살리는 것이라고 믿소만"이라는 황제의 메모를 받자 총재는 금리를 다시 4%로 낮췄다.

정치권은 중앙은행에 항상 무엇을 요구한다. 영국과 전쟁하는 나폴레옹은 저금리 대출을, 코로나19와 전쟁하는 요즘 우리나라 국회는 고용안정을 요구한다. 그런 요구를 따르느라 신뢰를 잃으면, 위기가 닥쳤을 때 중앙은행의 행동 반경이 줄어든다. 그래서 배짱과 기개가 필요하다.

18일은 나폴레옹 밑에서 배짱과 기개가 유난히 부족했던 프랑스은행의 221번째 생일이었다.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