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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입력
2021.10.0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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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매드랜드'

편집자주

주말 짬 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열심히 죽어라 일만 하다가 벌판으로 쫓겨난 가축, 우리가 그런 신세죠. 이 사회가 우릴 벌판으로 내쫓으면 우린 함께 모여서 서로를 돌봐줘야 합니다.”

영화 ‘노매드랜드’(2020) 속 밥 웰스의 대사

지난여름 개봉한 ‘싱크홀’은 빌라 전체가 싱크홀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립니다. 재난을 맞은 사람들의 여러 사연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춥니다. 주인공 동원(김성균)은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합니다. 회사 동료들은 축하하면서도 아파트가 아닌 점을 아쉬워합니다. 주거지 양식에 따라 계층을 판별하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동원의 부하직원 김 대리(이광수)는 영화 결말부에 주변 사람들을 신혼 집으로 초대합니다. 한강변에 자리잡은 집은 캠핑카입니다. 정상적인 노동활동으로는 집을 살 수 없는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집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에서 집은 사는(Live) 곳이 아니라 사는(Buy) 것이 됐습니다. 2004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귀신이 산다’는 집 없는 사람의 설움을 소재로 삼았는데, 17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더 지옥도에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최근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화천대유’는 부동산 광풍에 휩싸인 복마전 한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집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꿈꾸는 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는 본질을 잃은 채 집값과 거주라는 실존적 의미에만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요. 올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노매드랜드’(2020)는 집에 대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집을 통해 인생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기도 합니다.

웨이브에서 ‘노매드랜드’ 바로 보기

①그녀가 집을 떠난 이유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집 없는 떠돌이입니다. 원래는 안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네바다주 엠파이어라는 소도시에서 남편과 함께 오래 살았습니다. US석고라는 회사가 엠파이어의 젖줄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제조업이 쇠퇴하고 US석고의 사세가 기울면서 엠파이어도 조락의 시기를 맞습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2011년 공장이 폐쇄된 후 엠파이어는 유령 도시가 됐고, 우편번호까지 사라지게 됩니다. 얼마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펀은 더 이상 엠파이어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길을 떠나고, 밴에서 생활하는 삶을 시작합니다.

펀은 자의보다 타의에 의해 시작한 ‘바퀴 위 삶’에 조금씩 적응해 갑니다. 거대 인터넷 쇼핑업체 아마존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아마존 캠퍼포스’에서 일하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노하우를 하나 둘 배웁니다. 동료 린다를 통해 ‘고무바퀴유랑자모임(RTR)’이라는 공동체를 알게 되고, 본격적인 떠돌이 생활에 진입합니다.

②집 밖에서 세상을 만나다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펀은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고, RTR에 합류합니다.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따스한 남쪽에 모여 한시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쓰지 않는 물건을 싼 값에 거래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왜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지 자신들의 사연을 털어놓습니다(이들은 배우가 아니라 실제 유랑자이고, 자신들의 실제 삶을 이야기합니다). 경제적인 이유가 크지만, 새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느 노년의 남자는 베트남전 참전 후유증을 이겨내기 위해 세상을 떠돕니다. 스왱키라는 여성은 친구가 새 요트를 집 마당에 세워둔 채 퇴직 즈음에 죽은 걸 보고 충격을 받아 유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더 나이가 들고 병들기 전에 세상을 주유하고 싶었던 겁니다.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펀은 조금씩 동료들의 생각을 이해하게 됩니다. 떠돌며 살기 위해선 지독한 추위와 고독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그 대가로 얻는 기쁨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조각해낸 풍경이 멋들어진 배드랜즈를 즐길 수 있고, 협곡을 바라보며 저녁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펀은 엠파이어에 계속 머물렀으면 볼 수 없었던 풍광을 마주하고, 이전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일들과 조우합니다. 암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스왱키의 말은 펀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콜로라도 호수에선 큰 펠리컨이 스치듯 지나갔어. 한번은 모퉁이를 돌자 절벽이 나오는데 수많은 제비가 거기 둥지를 틀고 있었어. 제비 떼 날아다니는 모습이 물에 비쳐서 마치 나도 나는 느낌이었지. 사방팔방이 제비 떼였어. 새끼들이 부화하며 알 껍데기가 떨어져 수면 위를 떠다녔지… 그때 느꼈지. 이만하면 완벽한 삶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③멈출 수 없는 떠돌이 생활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길 위의 삶은 편치 않습니다. 펀의 밴은 낡아서 고장이 나고 맙니다. 정비소에선 수리비가 2,300달러인데, 차 시세는 5,000달러가 채 안 되니 차라리 팔고 새 차를 사라고 합니다. 펀은 “제 집”이라며 차를 처분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합니다.

펀은 돈을 빌리기 위해 언니를 찾습니다. 언니 내외는 부자 동네 근사한 집에서 삽니다. 뒤뜰에서 언니 내외 지인들과 바비큐 파티를 하며 대화를 나누다가 집이 화제에 오릅니다. 누군가 “요즘 경기가 좋아 물가도 오르고, 2012년엔 (부동산으로) 대박을 터트렸지”라고 말하자 펀은 발끈합니다. “평생 모은 돈에 빚까지 내가면서 무리하게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거 난 이해가 안 돼요”라고 반박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집을 잃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미국에서 부지기수였는데, 또 다시 사람들에게 무리해서 집을 사게 해 수익을 올리는 사업방식에 문제제기를 한 겁니다. 금융위기가 주택담보 부실 대출에서 비롯된 것을 감안하면 펀의 지적은 온당합니다.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펀의 언니는 떠돌이 생활을 그만하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펀은 거부합니다. 펀은 유랑하며 알게 된 데이브의 초대로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비슷한 제안을 받습니다. 펀은 안락한 데이브의 집에서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자신의 차로 돌아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리 좁고 비루해도 자신의 집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펀은 이른 아침 데이브에겐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납니다.


④집은 추억이고 기억이다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펀이 언니의 집이나 목장 딸린 데이브의 주택에서 살 수 없는 이유는 ‘기억의 부재’입니다. 펀은 언니랑 자랐지만 언니 내외가 살고 있는 집에선 아무런 추억이 없습니다. 화목한 데이브 가족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펀은 데이브와 아들이 함께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날이 밝으면 떠날 것을 각오합니다. 오랜 시간 집에서 함께 지내며 추억을 쌓은 그들 사이에 틈입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죠. 데이브와 연정을 나눈다 해도 그는 그 집의 진정한 구성원이 될 수 없었던 거죠.

펀은 RTR의 리더인 밥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해줬던 말을 꺼냅니다. “기억되는 한 살아남는 거다.” 물리적 존재보다 정신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펀에게 집은 몸이 편하거나 가격이 높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보다 정서적 교류를 하거나 애착이 깃든 곳을 의미합니다. 집은 그에게 추억이고 기억인 셈입니다.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매드랜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앞부분 막 유랑 생활을 시작한 펀에게 어느 소녀는 묻습니다. “엄마 말로는 집이 없으시다(Homeless)던데 진짜예요?” 펀은 놀라며 답합니다. “집이 없는 것(Homeless)은 아냐. 거주지가 없는 것(Houseless)이지.” 사는(Buy) 것보다 사는(Live) 곳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부동산 광풍이 잦아들고 우리도 집을 진정 사는 곳으로 여기며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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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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