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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없는 감각

입력
2022.07.07 20:00
수정
2022.07.11 11:02
25면
0 0
백승주
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서울 용산구 옛 미군기지에 조성된 용산공원 바람개비. 뉴스1

서울 용산구 옛 미군기지에 조성된 용산공원 바람개비. 뉴스1

여름이니까, 바다로 가자. 바로 갈 수 없으니 잠시 눈을 감아 보자. 당신은 국내의 한 휴양지에 와 있다. 해변가에는 태양이 작열한다. 때마침 당신의 눈에 멋들어진 커피숍이 하나 들어 온다. 여기서 질문! 당신의 상상 속에서 떠올린 그 커피숍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커피숍 간판은 알파벳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한글로 되어 있는가? 이를테면 그 커피숍의 이름은 'Cafe Libre' 일 수도 있고 '자유 다방'일 수도 있다.

이제 당신은 커피숍 안에 앉아 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당신은 커피를 마신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당신은 언젠가 이런 커피숍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상은 뭉게뭉게 구름처럼 커진다. 어느덧 당신은 대형 카페의 소유자가 되어 있다. 당신은 고민한다. 카페의 이름은 뭐라고 지어야 할까? 카페의 벽은 어떻게 장식하지? 멋있는 외국어 문구를 써넣을까? 'Viva La Vida' 같은. 아니면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한국어로? 아니 어쩐지 그건 촌스러워. 대박 나야 하는데 장사가 안 될 것 같아. 그렇다면 긴 영어 문구를 멋들어지게 써넣어 볼까?

휴양지 카페에 대한 상상 속에서 당신은 당신이 앉아 있는 풍경의 언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자유 다방'보다는 'Cafe Libre'를,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문구보다는 'Viva La Vida'라는 말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운영하게 될 카페의 이름도 영어나 뜻은 뭔가 있어 보이는 유럽의 언어로 짓게 될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접하는 거리의 풍경을 생각해보면, 당신이 로마자를 사용하는 언어를 선택할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더 높을 거라고 추정할 수는 있다.

이러한 선택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 태도'를 드러낸다. 이 언어는 과학적이고 저 언어는 우아하며 그 언어는 거칠고 시끄럽다고 느끼는 것, 그것이 언어 태도다. 영어나 유럽어 문구로 벽면이 치장된 커피숍에서 마시는 커피가 더 '분위기' 있고, 고급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 또한 언어 태도다. 이와 반대로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들이 거리에 등장하는 것을 바이러스가 창궐한 것처럼 불쾌해할 수도 있다. 이것 역시 언어 태도다.

여기까지 읽고 자신의 언어 태도를 확인한 이들 중에서는 죄책감에 빠지거나 반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한국어와 한글을 사랑하는데! 그러나 너무 마음 상해할 필요는 없다. 사회언어학의 관점에서 이런 언어 태도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언어 태도는 특정 언어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문화화의 과정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언어 태도를 가지고 있든 그것은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이 말은 언어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이니 언제나 그 자체로 옳다는 뜻도 아니다. 언어 태도의 형성에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구조적 모순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

쿠퍼와 피시먼이라는 학자들이 수행한,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모두 사용하는 이스라엘의 무슬림들에 대한 언어 태도 실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실험에서는 담배의 해악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들려주었는데, 히브리어 설명을 들은 그룹이 아랍어 설명 그룹보다 더 높은 비율로 담배에 대한 과세를 지지했다. 반대로 이슬람 율법에 따라 금주해야 한다는 내용을 아랍어로 들은 그룹은 같은 내용을 히브리어로 들은 그룹보다 더 많이 술에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무슬림들이 무의식적으로 히브리어는 과학적인 논의를 할 때 더 적합한 언어, 아랍어는 종교적인 대화를 할 때 더 적절한 언어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처럼 우리들의 언어 태도는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한국어와 한글을 사랑하지만 당신의 눈과 손이 알파벳이 찍힌 예쁜 티셔츠로 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사실 우리의 언어 태도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와도 같다. 특히 영어에 대한 언어 태도가 그렇다. 1990년대 초 소위 강남 오렌지족들의 일탈이 문제가 되자, 한 놀이공원에서는 '일부러 우리말을 서툴게 하는 남자', '영어 반, 우리말 반을 섞어 쓰는 사람'들을 출입 금지 대상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사람의 능력을 그의 영어 실력과 등치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영어 강의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한국 대학의 임용 시장에서 학자로서의 역량은 사실상 영어 실력으로 '측정'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 한 대기업에서는 한국어가 없는 '영어공용화'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한국의 언어 시장에서 영어는 그 어떤 언어보다는 가치 있는 상품이다. 이 상품이 얼마나 값어치가 나가는지 실제 업무 능력과는 상관없이 영어만 잘하면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 사용을 '재수 없어' 하면서도 동시에 영어에 능통한 이들을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러한 언어 자본을 갖추기를 욕망한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그가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자본을 가졌다는 표지다. (모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모어 수준으로 익히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영토, 하나의 언어라는 한국어 단일언어주의,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세계화를 위해서는 영어만 사용해야 성공한다는 영어 단일언어주의, 그리고 다종다양한 언어가 함께하는 다중언어라는 실제 현실. 한국인들은 이러한 모순과 억압의 언어 현실 속에서 방황한다. 한국인의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마음들이 경쟁한다. 자본이 되는 영어를 욕망하지만 또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으니 한국어만을 사용해야 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영어를 못하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감. 그러다 고개를 돌려보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다양한 언어가 출현하는 세상을 볼 때의 당혹감. 이런 마음들 사이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이윤을 가져다주는 영어에 대한 욕망이다. 왜냐? 영어는 한국 사회라는 놀이공원의 '프리패스'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차원에서 내던진 말이기는 하지만 용산 공원을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부르면 더 멋있어 보인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이러한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대통령이 거버먼트 어토니와 같은 생경한 영어를 사용하면서 법무부 장관의 자질을 설명하는 장면은 자신이 영어라는 언어 자본을 가졌음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힘센 언어 영어의 위세를 이용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언행에 반발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는 많은 한국인들이 가진 언어 태도를 너무나 투명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정작 내가 대통령의 발언에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던 것은 다른 이유다. 대통령의 영어 사랑 발언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그가 ‘공공의 것’, 더 나아가 ‘공공의 언어’에 대한 감각이 부재하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대형 카페의 소유주라고 생각해보자. 지금 당신 눈에 잔디밭이 당신의 땅이라면, 그 땅에 동상을 세우든, 그 땅을 메모리얼 파크라고 부르든 아무도 상관할 사람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거리를 걸으며 접하는 가게, 아파트, 상가 건물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풍경 속에서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만나는 이유 중 하나다.

거리는 공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민간의 공간이라는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가게의 주인은, 아파트 시공사들은 어떤 언어가 자신들에게 더 큰 이익을 줄 것인지에 따라 언어를 선택한다. 그 언어가 어떤 이들에게 해독 불가여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언어 선택에서 고려사항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나는 영어 이름을 가진 호텔의 예식장을 찾지 못해 애를 먹는 노신사를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호텔의 소유주는 노신사의 사정 따위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소유주에게 중요한 것은 어려운 영어 이름을 써서 호텔이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얻고, 그 이미지를 이용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을 위한 공간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이런 공간의 용도는 최고 지위의 공직자라고 해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공간에 붙이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국립 병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국제화 추세에 맞춰 더 멋있어 보이는 National Hospital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공공의 공간에서는, 공공의 일에는, 공공의 언어가 소통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공의 언어를 사용하자는 말은 한국어를 '보호'하고 영어나 다른 언어를 배제하거나 '순화'하여 언어 경관을 '청정'하게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한국 대통령이니까 무조건 한국어만 해야 한다는 소리도 아니다. 공공의 언어를 사용하자는 말은 시민들이 쉽게 공공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시민들이 가진 다양한 언어적 배경을 인정하는 언어권을 보장하라는 말이다. 공공의 언어의 관점에서 영어나 다른 언어의 표현이 필요하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시민권과 언어권을 보장하는 입장에서 한국의 공공 기관 명칭을 정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한국어로 기관의 이름을 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당위적으로 한국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한국어로 기관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 이유는 대다수의 시민이 한국어 화자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한국어도 쉽고 명확한 한국어야 한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다른 언어적 배경을 가진 시민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여러 언어들을 병기하고,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된 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높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영어와 관련된 대통령의 발언들을 보면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이니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겠다는 인식이 읽힌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사적 소유물이 아닌 공공의 것을 다루고 있다는 감각, 공공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감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는 공공의 언어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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