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산업에너지 절약, '제대로' 하려면
컨설팅해주고 나중에 절전 비용으로 회수
전기료 저렴해 에너지절약 유인요소 없어
지급보증 어렵고 융자 위주 정책도 걸림돌
#1. 초지기(종이 뽑는 기계) 3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전북 전주시 제지업체 A사. 이곳은 지난해 4억3,000만 원의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는 데 성공했다. 비결은 증기 재압축 장치였다. 증발하는 증기를 다시 압축해 연료로 쓰는 장치를 초지기 2대에 달았더니, 온실가스 1,542톤을 줄이고 연간 781만 킬로와트시(㎾h)의 전력을 아낄 수 있게 됐다.
#2. 한국도로공사(도공) 전북본부는 2019년 12월 터널∙가로등의 기존 조명 4,139개를 발광다이오드(LED) 2,900개로 바꿨다. LED등은 기존 설비보다 전력을 절반만 쓰면서도 수명은 5배 길다. 전북본부가 아낀 에너지 비용은 연 3억4,000만 원, 절감한 전력소비량은 연 286만 ㎾h에 달한다.
A사와 도공 전북본부 단 두 곳이 절약한 전력량 1,067만 ㎾h는 서울 1인가구 1,494가구의 1년 전력 수요(2020년 기준)와 맞먹는다.
에너지 다이어트, 에스코를 아시나요
두 곳의 ‘에너지 다이어트’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에너지 절약 전문기업(에스코·ESCO) 제도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에스코 업체는 공장 등 에너지 사용자의 에너지 절약 사업에 참여해 △시설 진단 △자금 마련 △유지 보수 등 서비스를 제공한다. 에스코 업체는 에너지 절약을 통해 기업이 아낀 비용을 나중에 회수하는 식으로 재원을 마련한다.
언뜻 봐서 누이(공장) 좋고 매부(에스코 업체) 좋을 것 같은 에스코 제도. 그러나 그 인기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한국에너지공단이 정책융자 등 지원 건수 기준으로 집계한 에스코 사업 실적은 1993~2014년까지 연평균 190건이었으나 2015년부터는 연평균 45건에 불과하다.
시장 축소 이유로 거론되는 것은 '저렴한 전기요금'이다. 많이 써도 부담이 없고, 줄여도 큰 경제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기업들이 에너지 절약 설비 설치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산업용 전력 판매단가는 메가와트시(㎿h)당 94.8달러(약 12만3,000원)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08.9달러)에 못 미친다. 이는 산업용 전력요금을 공개한 OECD 34개국 중 23위 수준이다. 한국전력 관계자는 "전기요금이 낮은 수준으로 장기간 지속되다 보니, 기업들도 에너지 절약 필요성을 체감하는 정도가 낮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팩토링(금융기관이 기업에서 어음 등 매출채권을 사들이고 자금을 빌려주는 것)이 없다는 점도 이유로 꼽힌다. 에스코 업체의 진단을 받은 회사가 에너지 저감시설 투자를 위해 채권을 발행하면, 금융기관이 이를 근거로 돈을 빌려주는 방식이다. 원래는 에스코 사업에도 팩토링이 있었지만, 에너지 절감 실패 때의 책임을 금융기관도 부담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 2014년부터 사실상 중단됐다.
지급보증 사라지자 실적 급감
일종의 지급보증 형식으로 에너지 절감 사업을 지탱하던 팩토링이 사라지자, 에스코 업계엔 찬바람이 불었다. 정부가 2015년 금융기관과 협의해 일부 설치 투자에 한해 팩토링을 재개했지만, 전면적 활성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금융 쪽에서 정책 지원이 약하다 보니 에스코 업체의 신용등급도 개선되기 어렵다. 에너지 진단 전문성을 인정받아 정부 포상 경력도 있는 한 에스코 업체는 최근 5년간 에너지 저감 수요업체 4곳에 투자해 △에너지 발생량 연간 약 2,000 석유환산톤(toe·1toe는 석유 1톤을 태워 발생하는 에너지량) 감소 △에너지 절감금액 15억 원 등 실적을 쌓았지만, 회사 신용등급은 투기등급인 BB+에 머물러 있다. 이 업체 대표는 “지급보증 없이 자체 금융만으로 투자금을 충당하다 보니 부채비율이 200%를 넘었다"고 말했다.
에스코 업체 투자 지원을 담당하는 에너지공단은 “팩토링 중단이 에스코업계 투자 감소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에스코 사업 부진에는) 중소기업 중점의 에너지 효율화 정책을 펴면서 2010년대 중반부터 대기업에 대한 에스코 융자를 중단하는 등 구조적 요인도 있었다”고 했다.
융자중심 지원 한계... 보조금 검토 필요성
전문가와 현장 관계자들은 산업 분야 에너지 수요를 효율적으로 줄이려면 에스코 제도 활성화가 필수적이라고 진단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에너지 다소비형 제조업의 비중은 미·일·독·영·프 등 5개국 평균의 2배 수준”이라며 “산업 에너지 수요의 효율화 없이는 온실가스 감축목표 이행도 불가능하다"고 충고했다. 그는 "에너지 수요 저감에 특화된 에스코 사업이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에스코 사업 지원책은 융자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 산업부는 6월 에너지 수요 효율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에너지 저감 시설을 설치한 사업체의 에너지 절감 예상액을 평가해 보증 규모를 정하고 에스코 기업 등을 우선 지원하는 효율 투자 녹색보증제도를 신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에스코 업체들은 돈을 빌려주는 방식도 좋지만 에너지 저감 사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 에스코 업체가 지난해 소기업 120곳 현장을 방문해 조사한 결과, 저감 시설 설치에 에너지공단의 융자를 쓰겠다는 업체는 30%에 불과했다. 이임식 에스코협회 회장은 “저감설비를 설치할 여력이 없는 영세 업체를 위해선 빚이 되는 융자보다 보조금 지급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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