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는 중국, 사라지는 관시]
코로나 봉쇄에 한국기업 대면활동 올스톱
시장 조사, 사업 확장, 거래처 관리 불가능
주재원 임기 끝나도 후속 지원자가 없어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죠. 그런데 지금은 어려운 친구 한 명도 못 도울 정도로 제 상황이 어렵네요."
중국 상하이에서 10년 넘게 화장품 유통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 A씨는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는 오래 알고 지내던 쇼핑몰 입점 담당자(중국인)로부터 최근 사적인 부탁을 받았다. 평소 사업 관계를 고려해 웬만하면 부탁을 들어줬겠지만, 코로나 봉쇄에 따른 사업 위축으로 내 코가 석 자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직접 만나 밥이라도 먹으면서 미안함을 풀었겠지만, 당국의 방역 탓에 도시 봉쇄가 길어지면서 중국인 친구를 만날 기회조차 없다.
A씨는 "중국에서 보통 관시(關系·개인 간의 인연과 인맥을 뜻하는 중국어)는 식사 자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지금은 이미 알던 사람들을 만날 일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사업을 확장하기는커녕 있는 사업망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현실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코로나 초기만 해도 마스크를 구해 달라는 중국 바이어의 요구에 분주하게 뛰어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는데, (코로나 봉쇄가 이어지는) 지금은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시기"라고 토로했다.
인천→베이징 여객, 99% 줄었다
중국 정부의 고강도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주요 도시 봉쇄가 기약 없이 길어지면서, 국내 기업들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현지 네트워크도 차츰 소멸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3년 가까이 적자가 누적된 가운데 봉쇄가 설상가상으로 덮치자, 이제는 사업 존립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관계 실종 상태가 이어지는 중이다. 중국 시장 공략의 필수 요소인 '관시 비즈니스'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데다, 봉쇄로 인해 중국에서 일할 인재 확보에도 비상이 걸리면서, 중국과의 연결고리가 아예 끊어지는 파탄의 단계로 치달을 수 있다는 최악의 우려마저 나온다.
7일 국토교통부 항공정보포털시스템에 따르면, 제로코로나 정책이 본격화된 올해 3월부터 지난달까지 8개월간 인천발 베이징행 항공편은 총 411편 운항됐다.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 같은 기간(4,351편)과 비교하면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쪼그라든 셈이다. 여객 규모 감소는 더 심각한데, 2019년 3~10월 82만 1,214명이 인천발 베이징행 여객기를 이용했지만, 올해는 이용객이 8,756명으로 98.9%나 급감했다. 양국 수도를 잇는 하늘길이 100분의 1로 좁아진 것이다.
중국 정부는 밖으로 향하는 문만 걸어잠근 게 아니라, 내부 통제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베이징과 상하이 등 주요 도시들이 산발적으로 봉쇄되면서, 중국 내 이동마저 자유롭지 않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중국 전역에서는 총 4,234편의 항공기가 운항했는데, 이는 2019년 같은 날 운항편수(1만1,738편)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철도와 장거리 버스 등 대중교통 운행 또한 예고없이 중단됐다가 재개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만나야 뭐라도 하는데... 꽉 막힌 관시
한국 기업인들은 제로코로나 이후 중국 정부나 거래처 관계자들을 대면으로 접촉하는 일은 사실상 중단됐다고 입을 모은다. 인허가 당국이나 거래처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해도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약속을 잡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현지 시장 조사 △신규 거래선 구축 △기존 거래처 관리 △현지 인력 충원 등 모든 분야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면 접촉 부재는 다른 곳에서보다 중국에서 더욱 치명적 결과로 이어진다. 중국은 물건을 살 때도 직접 눈으로 봐야 하고, 거래를 할 때도 상대를 직접 만나 결정하는 전통적 상거래 관습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넓은 면적 때문에 지역별로 유통 플랫폼과 바이어 등이 따로 존재하고, 지역 정부의 권한도 크다. 가령 베이징에서 사업하던 사람이 광저우에서 판로를 넓히려면 아예 맨땅에서 새롭게 네트워크를 구축해야할 정도다. 조평규 전 중국 연달그룹 수석부회장은 "관시의 나라인 중국은 비대면 방식(전화 통화나 문서)으로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것을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며 "사람은 안 보면 멀어지기 마련이라 봉쇄가 풀리더라도 그동안 쌓은 우정이나 신뢰를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대면 홍보나 현지 시장 조사가 필수적인 뷰티 업계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지난해 5월 위생허가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산 화장품이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의 판매 허가를 받기까지의 과정이 까다로워졌고, 올해부터는 특수 화장품의 경우 원료 정보 등 제출해야 하는 서류도 늘어났다. 기존 3~6개월이면 가능하던 허가가 최근에는 1년 이상 걸리고 있다. 중국 마케팅 전문업체인 제이프렌즈의 장래은 대표는 "현재 중국 뷰티 시장은 3개월 단위로 관련 제도와 소비 트렌드 등이 빠르게 바뀌는 중"이라며 "(현지에 갈 수가 없어) 정확한 시장 환경을 파악할 수 없는 데다, 현지 조직 자체가 와해된 곳이 많아 대관, 홍보, 마케팅이 일절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주재원 임기 끝나도 후임자 못 구해
현지 조사를 거친 뒤 투자나 사업 확장 등 의사 결정을 신속하게 내려야 하는 한국 기업 경영진도 속이 탈 수밖에 없다. 통행 제한과 영업 정지가 반복되면서, 현지에 사업장을 둔 한국 본사와 중국 직원들 간의 소통이 단절됐다. 대기업은 그나마 관리가 가능하지만, 소수 직원만 현지에 남기고 간판만 유지 중인 중소기업의 상황은 암울하다. 국내에서 생활용품을 만들어 중국으로 파는 B씨는 "중국에선 접촉자만 있어도 사업장이나 건물 자체가 봉쇄되기 때문에 대면 접촉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크다"며 "동료 직원 얼굴도 마음놓고 못 보는 상황이라 거래처와 위챗(중국 메신저)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한국무역협회 상하이지부가 올해 6월 중국에서 영업 중인 국내기업 177곳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 결과 절반이 넘는 55.3%의 기업이 사업 축소 및 중단, 철수, 이전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중국 내 한인단체 관계자는 "이곳(상하이) 교민 구성은 70%가 자영업 종사자, 30%가 대기업 주재원"이라며 "자영업자의 경우 일부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갔고, 남은 이들 또한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기간 봉쇄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 갇힌 주재원들도 불편함을 호소하긴 마찬가지다. 후임자와 교대한 후 한국에 귀국해야 할 시기가 이미 지났지만, 본사에서 '무기한 연장' 통보를 받고 복귀하지 못하는 주재원들도 많다. 일부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중국으로 가려는 후임자가 나서지 않는 상황이다. 봉쇄 정책으로 중국 생활이 불편해지고 의료시스템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대기업 관계자는 "중국 시장 상황 자체가 워낙 좋지 않아 실적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워 임원들이 경력에 흠집이 날까 발령을 피하고 있는 분위기"라며 "중국 현지 공장이나 사업장 방문이 급한 기업들도 출장 계획을 잡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관시 비즈니스 전환 시도할 때
전문가들은 한중 간의 물리적 접촉이 끊어진 지금 같은 상황일수록 중국 현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중국 전문가 이철 박사는 "중국 상황은 한국에 앉아서 듣고 판단하면 안되고 필히 현장을 확인해야 한다"며 "교민, 현지 기업, 기관들의 정보 공유와 가짜 정보 확인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지금까지 관시에만 의존했던 사업 방식의 대전환을 시도해 볼 만 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도 인구가 정체되고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증 인구 구조가 급격하게 변하는 중이고, 자기만의 개성을 강조하는 Z세대가 소비 시장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 박한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중국경제관측연구소장은 "중국에서는 위챗을 통해 비즈니스를 하는 비중이 높아 위챗 전용 카탈로그를 만들기도 한다"며 "코로나19, 미중 패권 경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연임 등 대외 환경의 변화까지 고려해 시나리오 관점에서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인맥과 네트워크를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중국 정부에 기업인들의 수월한 이동권 보장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는 현장 의견도 있었다. 조평규 전 수석부회장은 "기업인들의 코로나 격리 기간을 단축하는 입국절차 간소화(패스트트랙) 제도를 신속하게 재개해야 한다"며 "중국 측의 일방적인 거부로 중단된 상태지만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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