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마지막에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있다. 끝내 아이들은 사라질 것이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그림책 이야기다. 며칠 전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퇴출되는 동화책 사이에서 나는 이 책을 구해냈다. 섬뜩하고도 매혹적인 이 책의 공포는 이런 광경에서 비롯된다. 피리 소리에 홀려 기꺼이 자발적으로 사내를 쫓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나무 토막으로 변한 듯' 꼼짝없이 그 광경을 지켜만 봐야 하는 어른들. 모두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그 누구도 그 행동을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다시 매혹당한 채 책장을 넘기다 고개를 들어 눈이 내린 아파트 공터를 구경한다. 눈 때문인지 어린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평소보다 많은 아이들이 공터에 나와 있다. 분주하게 눈 위에서 뭔가를 만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저 아이들의 마지막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내게 수업 실연 강의를 들을 교사 지망생들의 마지막도.
나는 내가 교사 지망생들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여러분 교실에 들어온 학생은 교실을 나갈 때 다른 존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이란 그런 겁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학생이 함께 성장하여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 이건 일타강사가 절대 해줄 수 없는 겁니다. 일타강사들은 여러분 학생들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가르칠 시와 소설과 산문을 학생들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일타강사가 강의하듯이 하지 마세요. 항상 수업내용과 학생들의 삶과의 연결고리가 어디에 있는지 궁리하세요. 학생 혼자 문제를 풀도록 하지 말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수업을 설계하세요. 같이 사는 법을 익히게 해야죠. 저는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대학생이 아니라 시민을 만드는 교육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이 사회에서 온전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역량을 키우는 일을 담당해야 하고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너무 나갔다 싶어 입을 다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업 대화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귀한 사례들이 교사 지망생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반복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진짜 선생님은 여러분들이에요. 여러분이 하는 수업이 진짜 수업이에요. 일타강사가 하는 문제풀이가 아니라.
하지만 나는 내 강의의 마지막을 잘 알고 있다. 내 강의는 결국 실패한다. 언젠가 고등학교로 교생 실습을 다녀온 제자에게 현장에서의 경험이 어땠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 학생의 대답은 이랬다. "수능 대비해서 주로 문제풀이 수업하던데요." 이런 대답을 들을 때 나는 내가 가르친 모든 것들이 가짜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교사 지망생들은 내가 가르쳤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교육 현장에서 배울 것이다. 지망생들은 진짜 교육을 하려는 많은 교사들의 노력이 폄하당하거나 오히려 공격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교사 지망생들은 자신들이 가르쳐야 하는 것이 학생들의 삶과 연결된 수업내용이 아니라 서열을 정하기 위한 시험 기술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고, 교단 아래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학생이 아니라 교육 서비스에 불만인 소비자들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절망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 교육 서비스마저도 물처럼 '셀프'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셀프 서비스가 된 교육은 아이들에게서 선생님의 얼굴을 지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자신의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선생님은 '있어도 없는' 사람, 허상이 된다. 대신 화려한 화면 속 일타강사의 얼굴과 말은 진짜가 되어 추앙받는다. 기간제 교사들은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데 일타강사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벌어들인다. 정말 기이한데 아무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아이들이 제 발로 파멸을 향해 걸어가게 만들고 어른들을 나무 토막으로 만들어 이를 방관하게 하는 피리 소리는 1376년 하멜른에서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에서도 이런 피리 소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이 피리 소리의 곡명으로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적당한 것은 '능력주의'이다.
한국 사회가 그 피리 소리에 맞춰 추는 기이한 춤은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 내가 특히나 불편하게 여기는 춤은 수능 만점자들에 대한 보도이다.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언론들은 앞다투어 수능 만점자가 누구인지 발표하고, 그들의 말을 분석하며, 심지어 만점자의 부모가 누구인지까지도 보도한다. 이런 행태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날씨 보도만큼이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사실상 수능 만점자 보도는 한국 교육 제도의 일부이자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마지막 수업이다. 이 마지막 수업을 통해 한국인들은 능력주의의 피리 소리에 맞춰 군무를 춘다.
어렵게 노력해서 이룬 성취를 수능 만점자의 가족과 주변의 지인들이 축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수능 만점자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전 국민이 우러러봐야 하는 영웅처럼 대접하는 행태는 다른 일이다. 이런 보도 행태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다. 그 해악의 목록은 끝이 없다. 그중 가장 큰 해악은 줄 세우기 게임의 승리자를 영웅 서사로 치장하는 과정에서 승리자가 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깨끗하게 지워버린다는 점이다. 이것이 한국의 교육 제도가 매해의 마지막에 우리 아이들에게 하는 일이다.
수능 만점자 보도는 우리의 교육이 대학 진학자가 아니라 시민을 키워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하게 만든다. 즉 수능 만점자에 대한 이야기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고등학교 졸업자들의 삶을 지워버린다. 한국의 교육 제도가 사회에 진출하며 알아야 하는 노동법이나 기본 직무 지식을 가르쳐 주지 않고 그대로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는 사실도 지워버린다. 그렇게 수능 만점자 보도는 몇몇 소수만 남기고 모두를 실패자로 만드는 한국 교육 제도의 실패를 은폐한다. 수능 만점자 보도를 보면서 우리는 수능이 진짜 무엇인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 아이들을 위한 교육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따지는 것을 멈춘다.
'나'라고 부르는 자아는 내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이야기와 우리가 맺는 관계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고 우리의 운명을 판가름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이야기와 그 사회가 맺는 관계가 그 사회의 운명을 이끈다. 그런 의미에서 해마다 일종의 의식처럼 반복되는 수능 만점자의 이야기는 하멜른의 수상한 사내가 부는 피리 소리와도 같다. 그 이야기는 이 사회를 일그러진 능력주의가 만들어내는 파국으로 인도한다.
그러니 새해부터는 수능 만점자들의 경사를 굳이 전 국민에게 알리지 말고, 가족과 주변 지인끼리 마음껏 축하하도록 배려해주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은 많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일이 될 수 있다.
● 이 칼럼의 제목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A Small, Good Thing'의 한국어 번역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김연수 역)에서 차용한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