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같은 재난 상황 때마다 등장하는 옷이 있다. 민방위복이다. '정치인들의 알맹이 없는 퍼포먼스일 뿐'이란 평가도 나오지만 재난 극복 의지가 담긴 복장인 건 분명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작년 9월 태풍 '힌남노'로 큰 피해를 입은 경북 포항을 나란히 찾았을 때도 두 사람 다 민방위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색깔이 달랐다. 이재명 대표는 기존 민방위복인 노란색, 윤 대통령은 새로 도입될 시제품인 청록색이었다. 이 대표가 노란색을 고집한 이유가 있다. 그는 행정안전부의 민방위복 개편에 비판적이었다. 재난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복장 교체보다 시급한 민생 사안이 많다"는 메시지를 부각시키겠단 의도였다. 이 대표가 장화를 신은 것도 한 달 전 구두를 신고 관악구 수해 현장을 찾아 논란이 된 대통령을 겨냥한 거란 해석이 나왔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최근 윤희근 경찰청장의 복장이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31일 민노총의 대규모 도심 집회가 열리기 하루 전, 경찰청은 출입기자들에게 밤늦은 시간 공지사항을 알렸다. 다음 날 윤 청장이 경비대책회의를 직접 주재하기 위해 경찰청이 아닌 남대문경찰서로 출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아침, 지휘버스에서 내린 윤 청장은 기동복을 입고 있었다. 대규모 시위 진압이나 중무장한 범죄자 등을 제압할 때나 착용하는 특수 복장이다.
과격 집회에 엄정 대응하겠단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려스러운 건 청장의 메시지가 향하고 있는 지점이 과연 어디냐는 것이었다. 단지 일선 경찰들이나 시민에게 내는 목소리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지난해 8월 취임 후 10개월간 윤 청장이 걸어온 길을 되새겨보면 괜한 의심은 아니다.
윤 청장은 공식 취임도 하기 전, 후보자 시절 이미 내부 신뢰를 크게 잃었다. 당시 그가 경찰국 신설에 반대한 이른바 '총경의 난'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감찰과 경고 카드를 꺼내 들며 엄포를 놨기 때문이다. 취임 후 작년 말 화물연대 파업 땐 비(非)조합원 차량 유리창에 쇠구슬이 날아든 사건을 거론하며 "테러에 준하는 악질적 범죄"라고 일갈했다. 건설 현장 폭력을 대통령이 '건폭'이라 지칭하자 건설현장 불법행위 수사에 특진을 내걸었다. 지난달 16, 17일 민노총의 1박 2일 노숙 집회 논란이 일자 하루 뒤엔 예정에 없던 브리핑까지 자처해 "건설노조 불법집회를 단호하게 수사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날 브리핑은 급조된 탓인지 발표 내용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건설노조처럼 불법 집회 전력이 있는 단체의 유사 집회를 금지·제한하겠다"는 청장 발언엔 경찰 내부에서도 법적 근거가 없는 무리한 방침이란 반박이 나왔다. 불법 집회 전력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해선 안 된다는 건 법원의 일관된 판단이기 때문이다. 윤 청장은 집회·시위를 담당하고 있는 기동대원이나 경비부서 직원을 대상으로 또 특진을 약속했다. 하나같이 대통령실 기조에 발맞춘 행보들이다.
정치인이나 지도자의 옷은 때론 그 자체가 메시지다. 유권자(국민)를 위해 입어야 할 그 옷이 권력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독(毒)'이 되어 돌아올 공산이 크다. 윤 청장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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