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성난 사람들'로 미국 에미상 감독, 각본상 후보 오른 이성진
"김치찌개"로 한국 가부장 문화 보여주고 부모와 카카오톡으로 영상 통화
"한국인의 집단적 경험에 관심 많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길"
"누구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불리는 건 12세 소년에게 "끔찍"했다. 미국의 학교 선생님과 아이들이 이름을 엉뚱하게 부를 때마다 한국계 소년의 마음은 쪼그라들었다. 참다못한 소년은 학교 숙제를 'Sonny(써니)'란 영어 이름으로 써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틀리지 않고 부를 수 있도록 한국 이름까지 포기하면서 짜낸 고육책이었다. 그렇게 한국이름을 숨기고 산 학생은 성장해 내년 1월로 예정된 제75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 부문 감독상과 극본상 후보로 지명됐다. 4월 국내에도 공개돼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성진(41)이다.
에미상 감독상 후보 명단엔 '이성진'이란 한국 이름이 유일하게 올려져 있었다. 이름부터 먼저 쓰는 미국식 표기 방식이 아닌 성부터 먼저 쓰는 한국식 표기대로였다. 그는 2019년 넷플릭스에 공개된 성인 애니메이션 '투카 앤 버티' 대본 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 한국식 이름 표기를 고집했다.영화 '기생충'(2019)과 그룹 방탄소년단 등을 연료 삼아 K콘텐츠에 대한 위상이 급격이 높아지던 때였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얘기할 땐 미국인들이 실수하지 않더라고요. 정확하게 발음하게 노력하고요. 좋은 작품을 만들면 제 한국 이름을 듣고도 사람들이 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16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국제방송영상마켓'에 연사로 참여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선 박수가 터졌다.
에미상에서 작품상 등 13개 후보에 오른 '성난 사람들'은 이 시대 성난 사람들을 향한 풍자극으로 주목받았다. 집수리 등을 하며 간신히 먹고사는 한인 2세 대니(스티븐 연)와 화려하지만 위태롭게 살았던 중국계 이민자 에이미(알리 윙)는 난폭운전이 기화가 돼 서로를 향해 무자비하게 욕을 퍼붓고 가정까지 파탄 낸다. 이성진은 몇 년 전 차를 몰다 백인 남성 운전자로부터 직접 겪은 난폭운전 피해 경험을 소재로 대본을 썼다. 이렇게 시작된 드라마는 '분노사회'의 이면을 가감 없이 들춘다. 행사 후 취재진과 만난 이성진은 "코로나 팬데믹 때 각본 작업을 시작했는데 '난폭운전 비율이 340% 증가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쏟아지고 온라인엔 사람들이 분노를 마구 쏟아내는 영상들이 줄줄이 올라왔다"며 "상대에 대한 이해 없이 분노만 표출하면 얼마나 위험한 상황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들려줬다.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줄곧 미국에서 산 이민자가 쓴 '성난 사람들'엔 한국적 요소들이 곳곳에 녹아 있다. 대니는 여자친구를 사귀려는 동생에게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남편을) 집에서 기다리는 아가씨를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진은 "한인 교회를 다녔는데 거기서 누군가가 했던 말을 떠올려 대사로 썼다"며 웃으며 말했다. 한국의 가부장 문화는 반평생 넘게 미국에서 산 그에게도 낯설지 않은 정서였다. 극에서 'K장남'인 대니는 미국에 사는 부모님과 카카오톡으로 영상 통화를 하고 효도 선물로 '백색가전'으로 유명한 LG 가전을 마련한다.
전통적 한국 가정에서 자란 이성진은 모범생이었다. 그는 아이비리그의 펜실베이니아대로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같은 과 친구들이 대부분 미국 투자업계로 진출할 때 그는 블로그에 TV쇼에 대한 리뷰를 올렸다. 2003년 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와 콘텐츠 창작에 대한 꿈을 키운 그의 여정은 처음엔 가시밭길이었다. 차에 둔 짐을 몽땅 도둑 맞고 미국 방송사 NBC에서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너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라 창작에 대한 꿈을 한 번도 접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성난 사람들'로 주목받은 그에게 마블스튜디오는 신작 '썬더볼트'의 각본을 맡겼다. 미국인들이 그의 이름을 똑바로 부르는 것도 달라진 변화다. 성진은 이런 성공의 비결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그대로 표현한 것"을 꼽았다.
"할리우드가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엔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 고민했지만 이젠 아녜요. 다양성이 중요해졌거든요. K팝, 드라마, 영화뿐 아니라 한국인의 집단적 경험 자체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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