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미로를 헤매다] ②'월반'의 딜레마
조기진학 후 부적응 자퇴 사례 끊이지 않아
학교생활 필수적인 '정서적 성장' 고려 못해
"월반 나이 제한, 성장 교육 의무 적용 필요"
편집자주
사람들은 ‘천재 신화’에 열광하죠. 뉴스엔 IQ가 200에 가깝고 초등학교도 가기 전 미적분을 푼다는 어린 영재들이 월반을 거듭해 빨리 대학에 입학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하지만 이들이 뛰어난 학자로 자라났다는 해피엔딩을 접하긴 어렵습니다. 이 나라에서 어린 영재들이 언제나 좌절하고야 마는 이유는 뭘까요? 영재를 키우지 못하는 한국의 영재교육, 우리에겐 왜 항상 새드엔딩만이 익숙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일보가 한국 영재교육의 현주소를 들여다봤습니다.
'지능지수(IQ) 150에 과학고를 조기졸업한 엘리트.'
한국에서 영재의 특출남을 표현할 때 IQ만큼 자주 등장하는 '스펙'이 바로 초중고 조기졸업이다. 조기진급(월반)과 조기졸업은 영재성을 인증하는 필수 조건이나 마찬가지. '수학 신동' 백강현군은 초등학교 입학 1년 만에 5학년으로 월반했고, 중학교도 1년 만에 졸업했다. 세계 최고 IQ 보유자(210)로 기네스북에 올랐던 김웅용 신한대 교수는 8살에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에 입학했다. 대중은 이들의 조기진학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역시 천재는 다르다"며 열광한다.
이렇게 조기진학은 천재성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여러 실제 사례를 볼 때 반복된 월반과 조기입학은 영재 개인의 인생엔 '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백군은 고교 진학 한 학기 만에 자퇴했고, 김 교수는 10살에 미항공우주국(나사·NASA) 선임연구원이 됐지만 18세에 귀국해 검정고시를 치고 21세에 충북대로 다시 입학했다.
지능은 최상, 사회성은 보통인 '불균형'
지적 능력이 또래보다 앞서는 영재들의 학업을 위해선 조기 진급·진학은 필수적이다. 수준에 맞는 지적 자극을 받아야 학업 흥미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재학교와 과학고에선 조기 진학이 당연해진 지 오래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중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영재학교(서울과학고 등 8곳)에 입학한 학생은 2013년부터 10년 간 584명에 달했다. 일반 과학고 20곳의 대학 조기 진학자도 매년 전체 학생의 70% 정도였다가, 2016년 졸업 제한이 생기고서야 30%대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의 조기 진학·진급 제도는 영재의 다른 특성은 배제한 채 오로지 지적 능력만으로 평가된다는 점이다. 초중고 12년의 교육과정을 불과 수 년만에 끝낸 천재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육청 별로 조기진급·졸업 대상자를 선정할 때 '심신 발달 및 건강 상태가 양호하고 정서적 안정되고 사회 적응력이 양호한 자'라는 기준을 두고 있지만, 기준 자체가 모호할뿐더러 측정할 방법조차 없다.
전문가들은 진학한 학교에서 조기진학자의 특성에 걸맞은 적절한 정서적 성장 기반을 제공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청소년기에는 1, 2년 사이에도 발달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학업과는 별개로 정서적 성장과 사회적 발달을 위한 프로그램이 꾸준하게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례를 보면 비학업 요소에까지 큰 노력을 기울이는 영재학교는 드물다. 한 영재고 교장은 "영재라고 해서 모든 영역에서 영재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한 아이의 바른 성장을 위해선 여러 지원이 필요하다"며 "학교 안에서도 고민이 많지만 늘 부족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영재고엔 공동작업 필요한데...
지적 능력은 뛰어나도 사회적 능력은 또래 수준인 어린 영재들은 상급학교 진학 후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연구와 실험 같은 팀 프로젝트가 많은 과학고와 영재학교에선 특히 그렇다. 과학고를 졸업한 박모(29)씨는 "연구팀을 짤 땐 성적만 좋다고 같이 하기보단 사회성이나 의사소통 등 다양한 능력을 고려했다"며 "한 분야 성적만 뛰어난 어린 학생이 가뜩이나 입시 중심 치열한 환경에 들어오면 (못 어울려) 힘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전했다.
또래와 어울려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박탈감도 존재한다. 미국 유학 후 10세부터 나사에 재직했던 김웅용 교수는 최근 한 방송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열 살씩 나이 차가 나서 다른 연구원들 무리에 낄 수 없었고 못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며 "초등학교를 다녀보는 게 소원"이라 말하기도 했다.
지능과 사회성 사이의 간극을 좁혀보려고 대안을 마련하는 학교가 없지는 않다. 일부 영재학교는 다른 학생에 비해 적은 학점을 수강하는 대신 4, 5년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평균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특별반을 개설하거나, 교사 재량으로 1대 1 보충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영재들은 '낙인효과'를 우려해 '나머지반' 성격의 학급을 피하고 만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청소년기에는 이 같은 제도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박탈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월반에도 제한 둘 필요
이 때문에 조기진급·진학 횟수와 범위를 제한하거나 지적 능력 이외의 성장을 판단하는 기준을 따로 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송인섭 전 한국영재교육학회장은 "사람의 성장은 총체적으로 이뤄지는데 조기진학 조건으로 지적 발달만 따지니 (학생의) 부적응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최대 1, 2년 조기진급만 가능하게 하는 식으로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부 차원에서 조기진학자들의 성장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조기진학 이후 어려움을 겪으면 학년을 내려갈 수 있는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2014년부터 국제정보올림피아드 한국 대표단 단장을 맡아온 김성렬 건국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는 "지금은 아예 없는 (고도영재들의) 성장 지원 제도를 마련하는 동시, 조기 진학의 어려움을 '실패'로 규정짓는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야 한다"며 "적응도에 따라 학년을 오가는 자율성이 주어져야 학생도 부담없이 여러 (학업적)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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