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미로를 헤매다] ③빗나간 영재교육 열풍
영재고 전단계인 영재원 가려고 고액 사교육
영재원 경험을 생기부 통해 입시에도 활용해
사교육비 과중으로 귀결... 강남권 집중 현상도
편집자주
사람들은 ‘천재 신화’에 열광하죠. 뉴스엔 IQ가 200에 가깝고 초등학교도 가기 전 미적분을 푼다는 어린 영재들이 월반을 거듭해 빨리 대학에 입학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하지만 이들이 뛰어난 학자로 자라났다는 해피엔딩을 접하긴 어렵습니다. 이 나라에서 어린 영재들이 언제나 좌절하고야 마는 이유는 뭘까요? 영재를 키우지 못하는 한국의 영재교육, 우리에겐 왜 항상 새드엔딩만이 익숙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일보가 한국 영재교육의 현주소를 들여다봤습니다.
"안 배우고 잘하는 타고난 영재? 그런 건 세상에 없어요. 애가 공부에 관심만 있다면, 잘 못한대도 가르쳐서 잘하게 만들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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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하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학원가. 영재학교와 과학고 입시를 전문적으로 대비하는 대형 학원에서 입시 설명회가 열렸다.
"아인슈타인도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새로운 이론을 만든 거죠." 예비 영재의 수학 공부 로드맵을 설계해준다는 이 학원의 원장은, 영재는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창조 영재론'을 설파했다.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준비해온 노트에 원장의 얘기를 열심히 받아적었다.
원장은 "학원이 영재성을 기를 수 있다"는 점을 반복 강조했다. "영재학교에서 원하는 창의성을 기르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학원이 입시에 맞게 주제별로 가르쳐 드립니다." 설명회가 끝나자 학부모들은 질문을 위해 교단 앞에 줄을 섰다. 한 학부모는 강의실에서 나가며 "수학은 타고난 것과 상관없이 잘할 때까지 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날 들은 깨달음을 되새기기도 했다.
학원이 영재를 '창조'할 수 있다는 원장의 말은 사실일까? 사교육으로 '영재학교 입시에 필요한 원하는 특성'을 학습한다면 그 결과도 '영재성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유명무실한 국가 영재 지원
어린 자녀에게 영재성의 '기미'를 엿본 부모들이 사교육에 의지하는 현상을 그저 욕심 탓이라고 치부할 순 없다. 한국은 법률(영재교육진흥법)을 통해 뛰어난 영재를 조기 발굴·교육하도록 국가적 지원을 하는 나라지만, 정작 영재교육에 대한 지원은 많지 않다. 정부가 잠재력이 현저히 뛰어난 영재들을 '영재교육특례자'로 선정해 지원할 수 있도록 하지만, 특례자의 정의가 모호하고 선정이 되어봤자 상급학교 조기입학이나 배치 정도의 혜택만 받는다.
이 때문에 지원 근거가 생긴 뒤 특례자로 선정된 사례는 단 한 명. 2016년 홍콩에서 열린 국제 수학경시대회에 참여했다가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의 수학 영재 이정렬군 뿐이다. 최수진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연구센터 소장은 "정규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보다 빠른 속도로 학습하는 '속진 교육'은 특례자가 아니어도 받을 수 있다"며 "제도가 미비해 영재 지원의 대안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불안하니까"… 학원을 찾는 부모들
그래서 부모들은 학원가로 달려간다. 어릴 때 '신동'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었던 수많은 학생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사교육을 받으며 영재로 길러지고 있다. 최근 수년 간은 영재교육원(영재원)이 영재 키우기의 핵심 코스였다. 영재원은 일반 초·중학교에서 경험할 수 없는 연구나 교육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매년 탐구과제를 정해 실험을 하고 소논문 형태의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이 과정을 입시 자기소개서 등에 녹일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다.
영재원 수료 기록은 생활기록부에도 기재된다. 직접 가산점은 없지만 대부분 입시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부모들은 기대한다. 영재학교인 서울과학고를 졸업한 A(25)씨는 "과학고 부설 영재원 입학을 위해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학원에서 철저하게 준비해 붙었다"며 "일반 학교에선 못하는 특이한 과학 실험 내용을 자소서에 쓰는 식으로 (영재원 교육을) 입시에 활용했다"고 전했다. 다른 영재학교 졸업생 B(24)씨도 "주변 많은 친구들이 영재원이나 영재학급 출신"이라며 "입시 점수에 직접 영향은 없다 하더라도 불안하니까 하나라도 더 준비하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영재원이 입시용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건, 어떤 영재원에 아이들이 많이 몰리는 지는 보면 알 수 있다. 영재원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①교육청 직속기관 및 단위학교 영재교육원과 ②대학부설 및 유관기관 영재교육원이다. 이중 서울과학고, 한성과학고, 세종과학고 부설 영재원의 지원자 수는 교육청 부설 영재원들에 비해 항상 높다는 게 입시 전문가들의 얘기다.
대학 부설 영재원도 '명문대'로 알려진 학교의 부설일수록 경쟁률이 높다. 해당 대학 입시에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2024학년도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원의 수학 심화반 입학 경쟁률은 11.3:1, 과학융합반은 5.2:1 수준이었다. 하지만 서울 소재 다른 대학의 일부 영재원은 최근 몇 년 내내 지원자가 정원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교육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 세상의 최수일 수학교육혁신센터장은 "영재학교가 없는 초등생의 경우 특히 영재원이 인기"라며 "일부 대학 부설 영재원 수료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자격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렇다보니 영재원 합격을 위해 학원에선 초등 저학년용 '영재원 입학 코스'를 운영한다. 기출 문제, 합격 수기, 전문 컨설턴트의 자소서 컨설팅으로 구성된 상품은 대학 수시 입시와도 비슷하다.
영재원 수료와 영재학교 진학을 위해 쏟아붓는 사교육비는 어마어마하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자료에 따르면 영재학교를 희망하는 중3의 62.5%가 월 100만 원 이상의 고액 사교육비를 지출한다고 답했다. 일반고 진학 중3의 월 100만 원 이상 지출 비율(14.8%)의 4배가 넘는다. 300만 원 이상을 지출한다고 답한 비율도 25%다. 2024학년도 영재학교 합격 예정자 820명 중 186명(22%)이 서울의 5대 사교육 밀집 지치구(서울 강남·양천·송파·서초·노원구) 출신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사교육을 통한 '영재 만들기' 광풍을 잠재우기 위해선 공교육 체계 안에서의 영재 발굴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영재 양성은 부모 욕심에 학원에서 공장식으로 이뤄진다"며 "학교에서 수업 평가, 영재성 진단 도구 등을 활용해 재능 있는 아이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영재학교와 연결하는 식의 발굴·위탁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재들 결승점도 결국 의대?
이런 과정을 거쳐 영재가 양성되더라도, 상당수가 이공계가 아닌 의·약학대 쪽으로 유출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재학생이 의·약학대에 진학하면 △장학금과 추가 교육비를 전액 환수하고 △진학을 희망하면 전출을 권고하는 등 학교 차원의 제재 방안을 마련했지만 효과는 뚜렷하지 않다.
교육부에 따르면 8개 영재학교 졸업생의 의·약학대 진학자 수는 2021년 62명에서 2022년 71명, 올해 83명으로 매년 증가 추세다. 또 전학 권고를 받아들인 학생은 최근 3년 동안 단 1건에 불과했다. 서울과학고 재학생 C(17)군은 "같은 학년 120명 중 10명 정도가 의대에 갈 생각이 있다고 하는 걸 들었다"며 "학교가 불이익을 준다 해도 의사란 직업이 워낙 안정적이다 보니 인기가 있다"고 전했다.
의·약학대 진학의 경제적 이득이 월등하다 보니, 지금 정도 제재론 방지가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박대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환수하는 장학금과 향후 기대 소득을 비교하면 제도의 실효성이 없는 게 당연하다"며 "28개에 달하는 과학고, 영재학교 수를 줄여 정말 연구에 뜻이 있는 학생들만 교육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영재고 재학생이 졸업 직후 이공계로 진학했다가 반수로 의대에 진학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며 "졸업 후 5년간 (의·약학대) 진학을 금지하는 식의 새 차단안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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