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전쟁: 가족의 배신]
<4>망자도 산 자도 품위 있으려면
국가가 앞장서 공적 유언장 금고 마련
전국 312개 등기소서 보관 신청 가능
자필 유언장 단점 훼손·분실 우려 보완
공증보다 훨씬 저렴… 사후 50년 보존
장점 많아 이용 증가… 정부 홍보 강화
편집자주
상속 분쟁, 더는 남 얘기가 아닙니다. 사망자는 늘어나고, 가족 형태도 복잡해졌습니다. 부모님 사망 후 부동산에 욕심내는 형제도 눈에 띕니다. 저성장 추세까지 고착화되면서 상속은 '이 시대 마지막 로또'가 됐습니다. 이래도 가족과 안 다툴 자신 있습니까. 죽은 자도 산 자도 걱정이 없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한국일보가 취재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법무국 건물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물론, 그것의 주인조차도 정확한 보관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당연히 외부인 출입은 엄격히 통제됩니다."
시마타 아키히코 도쿄 법무국 공탁제1과장
지난해 11월 30일 도쿄 지요다구의 한 법무국(우리나라의 등기소 같은 곳)에서 만난 시마타 아키히코 공탁제1과장은 몇 번이고 '그것'의 철통 보안을 강조했다. 그가 국가 기밀문서처럼 지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도쿄 시민들이 작성한 유언장. 시마타 과장이 일하는 곳은 법무국 내에 자리 잡은 '유언장 보관소'다. 2020년 7월 일본 전역의 312개 법무국에 설치된 유언장 보관소에는 시민들이 작성한 자필 유언장이 안전하게 보관돼 있다.
3만5000원 내면 정부가 유언장 150년 보존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유언장 보관소를 이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시민들이 유언장을 보관하려면 유언 당사자가 법무성 산하의 법무국을 직접 찾아야 한다. 자신의 주소나 본적지, 보유 부동산이 위치한 곳의 관할 법무국에서 접수할 수 있다. 유언 조작이나 변조를 막기 위해 가족 등 대리인 접수는 불가능하다.
자필로 작성한 유언장을 가져오면 담당자는 본인이 맞는지, 요건과 규격을 잘 지켰는지 확인한다. 유언장으로 인정되면 법무국 내 비밀 서고에 보관된다. 당사자는 자신이 사망할 경우에 대비해 유언장이 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3명까지 지정할 수 있다. 이후 수수료 3,900엔(약 3만5,000원)을 지불하면 모든 절차가 끝난다.
유언장이 접수되면 원본은 유언자 사후 50년, 이미지 파일은 사후 150년까지 보존된다. 만약 유언 내용을 바꾸고 싶다면 기존에 보관했던 유언장을 철회하고 새로 접수시키면 된다. 시마타 과장은 보관소의 장점에 대해 "20만 엔(약 180만 원)이 넘는 유언 공증보다 훨씬 저렴하고 정부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만큼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당사자가 사망하면 생전에 지정한 사람이나 적법한 상속인만 유언장을 열람할 수 있다. 시마타 과장은 "사망 후 일주일 정도면 호적 정보가 연동돼 유언장 보관 사실이 지정된 사람에게 통지된다"고 말했다. 이미지 파일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열람은 전국 어느 법무국에서나 가능하며, 열람 수수료 1,400엔만 지불하면 된다. 다만 원본을 열람하고 싶다면 유언장이 보관된 법무국에 직접 가야 한다. 시마타 과장은 "가족들이 법무국에 고인의 유언장이 보관됐는지 먼저 조회를 요청할 수도 있으며, 유언장이 있다면 연락해준다"고 말했다.
상속분쟁 증가 일본… 해결책은 유언장 보관
일본 정부가 저렴한 가격에 공적 유언장 보관 시스템을 만든 이유는 다사(多死)사회로 진입하면서 상속 분쟁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일본 사망자 수는 156만 명으로 10년 전(125만 명)보다 25% 증가했다. 유산 분할 심판 건수도 2018년 1만202건에서 2022년 1만2,981건으로 증가했다.
일본 내 상속 전문가들은 생전에 유언장을 작성하는 게 사후 가족 간 분쟁을 막는 지름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상속 관련 상담·강연을 하는 혼마 후미야 상속 문제 대책 연구소 소장은 "부모가 남긴 집 한 채를 두고 형제들이 싸우거나, 누가 부모를 더 돌봤는지 따지면서 유산 분쟁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며 "큰 부자가 아니더라도 유언장을 남기고 사망하는 게 남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돕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유언장을 작성하는 비율은 아직 높지 않다. 2022년 유언 공증 건수는 11만1,977건, 자필 유언장 검인 건수는 2만500건이었다.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가 3,623만 명, 75세 이상 인구가 1,936만 명에 달하는 걸 고려하면 유언장 작성 문화가 정착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공증을 활용하면 확실하게 유언을 남길 수 있지만, 주변에서 보기엔 유난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필 유언장은 훼손이나 변조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개인이 금고를 사서 유언장을 두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고, 민법상 정해진 요건을 갖추지 않은 경우 효력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사자 사후 유언장이 발견되더라도 정말 고인이 쓴 것인지 시비가 붙는 경우도 적지 않다. 훼손을 막기 위해 어딘가 숨겨 놓으면 당사자 사후에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유언장 보관소는 자필 유언장과 공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시마타 과장은 "보관소는 안심하고 유언장을 작성해 맡길 수 있는 공적 금고"라고 말했다. 유언장을 제출한 사람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장기간 보존, 통지 제도, 정부 관리 등을 장점으로 꼽았다.
법무국은 자필 유언장 규격도 안내한다. 유언서 예시를 보여주고, 빠뜨리면 안 되는 것들을 체크리스트로 만들어준다. 상속을 받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을 써야 하고,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써야 한다. 부동산의 경우 정확한 주소를, 예금은 정확한 계좌번호를 기입하도록 알려준다.
유언장 보관소를 이용할 경우 검인 절차도 생략된다. 일본에선 자필 유언장이 발견되면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가정법원에서 검인을 받아야 법적 효력이 생긴다. 보관소에서 열람한 유언장은 이미 법무국 직원들이 본인 확인을 거쳤기 때문에 검인을 받았는지 재차 확인할 필요가 없다.
유언장 보관제도 운영해보니
정부가 운영하는 유언장 보관소의 장점이 알려지면서 법무국을 찾는 발길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2020년에 1만6,000건이, 지난해에는 1만8,000건이 접수됐다. 쓰네오카 후미코 요코하마 국립대 국제대학원 법학과 교수는 "보관소는 분실 및 훼손 위험이 없고, 상속인으로 확실히 증명된 사람만 열람이 가능해 매우 안전하다"며 "앞으로 활용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정부도 국민들에게 보관소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시마타 과장은 "시행된 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아직 국민들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며 "법무국 곳곳에 홍보을 비치하고, TV와 라디오 등을 통해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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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다사 시대와 '마지막 로또'
<2>남보다 못한 혈육 저버린 인륜
<3>어느 날 삼촌 빚이 도착했다
<4>망자도 산 자도 품위 있으려면
<5>상속 전문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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