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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차르’ 불곰 외교에 맞서려면

입력
2024.03.22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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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승리로 5연속 집권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모스크바의 선거 캠페인 본부에서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 모스크바= AFP 연합뉴스

대선 승리로 5연속 집권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모스크바의 선거 캠페인 본부에서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 모스크바= AFP 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공산권 봉쇄 정책을 입안했던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은 1945년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에서 러시아 차르들이 까마득한 옛날부터 영토를 확대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세계 문제에 관한 크렘린의 신경과민적 시각의 기저에는 전통적이고 본능적인 러시아 특유의 불안감이 깔려 있다.” (헨리 키신저 ‘외교’)

9세기 북방 노르만족 출신 루릭 왕조 등장 이후 러시아는 완전한 권력을 가진, ‘나라의 어버이 차르’를 통해 웅비를 꿈꿨다. 16세기 이반 4세,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 등 ‘융성한 러시아는 강력한 차르 아래서 가능했다’는 게 러시아인의 역사적 인식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를 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과 위성 국가들로 공산권 제국을 구축하는, 또 다른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미국 등 서방과의 체제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1991년 말 소련은 붕괴했다.

이후 초대 러시아 대통령이 된 보리스 옐친이 8년 실정 끝에 구원투수로 내세운 사람이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옐친과 달리 술도 마시지 않고, 유도 유단자에, 웃통을 벗고 얼음물에 뛰어드는, 국가보안위원회(KGB) 스파이 출신 40대 젊은 푸틴의 모습은 러시아 국민을 매료시켰다. ‘강한 러시아’를 앞세운 푸틴은 2000년 3월 러시아 2대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30년 집권의 길을 열었다. 차르의 현신이었다.

푸틴은 극도의 정치 혼란과 국가 부도 위기를 극복하면서 러시아 국민의 자존심을 되살렸다. 집권 1기 당시 러시아의 경제 성장률은 연평균 6%를 넘었다. 동시에 미국의 세계 패권을 견제하면서 다극 체제 중심 국가 중 하나로 거듭나고자 노력했다. 체첸, 조지아 등을 침공하면서 군사력을 과시했고 2014년 크름반도 합병으로 서방의 동진에 맞섰다. 공작과 탄압으로 야당과 언론은 기능을 상실했고, 반체제 인사들은 소리소문 없이 죽어갔지만 푸틴 치하 러시아는 기력을 되찾았다.

푸틴의 ‘흑화’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절정을 맞았다. 중국 이란 북한 등과 손을 잡고 신냉전 구도를 완성했다. 러시아는 언제든 주변 국가를 침공할 수 있는 나라가 됐고, 자유로운 핵무기 사용의 길마저 열어뒀다.

지난 17일 끝난 러시아 대선에서 ‘21세기 차르’에 등극한 푸틴 때문에 한반도 주변 정세 불안도 가중되고 있다. 푸틴은 소련 붕괴를 ‘20세기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규정했던 사람이다. 소련 같은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의 집권 5기는 중국의 ‘전랑 외교’ 못지않은 거칠고 투박한 러시아 식 ‘불곰 외교’가 예상되고 있다.

이미 한국을 겨냥한 공세도 시작됐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는 올해 초 정식 부임 전 언론 인터뷰 활동 등 외교 관례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주장 역시 자의적이었다. 마리야 자하로바 외무부 대변인은 한국 대통령을 향해 "편향됐다", "(발언이) 혐오스러워 보인다" 같은 비외교적 언사를 쏟아냈다. 러시아는 특히 북한과 무기 지원, 군사 기술을 맞바꿨다는 의혹으로 안보 지형도 흔들고 있다.

언젠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다시 북방 외교에 힘을 쏟아 러시아와도 관계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차르 푸틴의 러시아에 쉽게 물러서지 않는 한국 외교의 당당함과 전략적 고민도 지금 당장은 필요해 보인다.

정상원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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