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박사의 쓰레기 이야기]
편집자주
그러잖아도 심각했던 쓰레기 문제가 코로나19 이후 더욱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쓰레기 문제는 생태계 파괴뿐 아니라 주민 간, 지역 간, 나라 간 싸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쓰레기 박사'의 눈으로 쓰레기 문제의 핵심과 해법을 짚어보려 합니다. '그건 쓰레기가 아니라고요', '지금 우리 곁의 쓰레기'의 저자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이 <한국일보>에 4주 단위로 수요일 연재합니다.
석유를 정제하면 온도에 따라 가벼운 물질부터 분리돼 나온다. 기체(프로판가스나 부탄가스)부터 시작해서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가 차례대로 분리되고 마지막에 아스팔트가 남는다. 휘발유와 등유가 분리되는 온도 사이에 나프타(납사)가 나오는데 이것을 원료로 플라스틱을 만든다.
나프타는 초창기에 석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쓰레기로 치부돼 태워 날려 보냈는데, 나프타를 분해한 이후부터는 다양한 석유화학 원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설에 따르면 공장을 방문했다가 나프타를 태우는 것을 보고 노발대발한 '석유왕' 록펠러가 자기 공장에서 불필요한 것은 없다며 활용법을 찾으라고 호통치며 석유화학 산업이 시작됐다고 한다. 사실일 가능성이 낮은 야사지만, 록펠러 일화에서 플라스틱의 시작도 쓰레기 재활용이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플라스틱은 석유를 연료로 정제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을 원료로 써서 만든다. 이 말은 연료로 사용하는 석유량이 증가할 경우 나프타 생산량도 덩달아 늘어나서 플라스틱 생산량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려면 화석연료 에너지 사용 감축이 선행돼야 한다. 플라스틱 감축의 필수조건이다. 기후변화 협약에서 화석연료 퇴출·감축이 먼저 합의되지 않으면 플라스틱 국제협약에서 플라스틱 생산량 감축이 합의되기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화석연료가 에너지로 사용되는 게 줄어들면 자동으로 플라스틱 사용량이 줄어들까. 안타깝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에너지 용도로 가던 화석연료가 살길을 찾아 플라스틱 원료로 몰려올 것이다. 에너지 전환의 '풍선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2022년 '원유에서 화학물질' 전략을 발표한 후 석유화학 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2030년까지 하루 400만 배럴의 원유를 석유화학제품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아람코가 대주주인 에쓰오일은 2023년 9조2,000억 원을 투자한 '샤힌 프로젝트'를 통해 연간 320만 톤의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엑슨모빌이나 셰브론, 로열더치쉘도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석유기업들이 너도나도 석유화학 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하다 보니 2030년까지 만성적인 시설 과잉으로 플라스틱 원료 공급량이 수요량을 크게 앞지를 것으로 예상된다. 산유국들이 대규모 물량 공세를 통해 비산유국의 석유화학 업체를 도태시키고 시장을 장악하려다 보니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도 최근 경영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석유로 만든 신재(신규 생산 플라스틱) 가격이 떨어지다 보니 재활용 시장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석유가 에너지로 사용돼 직접적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막는다 하더라도 플라스틱으로 전환된 후 쓰레기로 소각된다면 결국 석유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은 줄어들지 않는다. 석유가 에너지로 가는 길목과 원료로 가는 길목 모두를 막지 않으면 석유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은 막을 수 없다. 기후운동이 에너지 문제에 매몰되면 안 되는 이유다.
산유국과 대규모 석유기업들은 플라스틱 국제협약에서 플라스틱 감량 의제를 무력화하기 위해 혈안이다. 석유에 대한 탐욕은 감추고 마치 쓰레기 관리만 잘하면 플라스틱 오염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선동한다. 줄이지 않으면 오염은 결코 줄어들 수 없다. 거짓 선동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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