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만 원의 가치를 따져 봤다. 그 돈으로 가능한 소비, 지난 몇 달간의 가계부, 최근 씀씀이, 통장 잔고, 꾹 참는 미래 지출 등을 긁적이다가 접었다. 고인이 된 누군가의 전 재산보다 4만 원 적은 금액이라는 인식 정도만 남았다. 어떤 이에겐 한 끼 비용이지만 누구누구에겐 한 달 치 식비일 수 있으니까. 액면은 같되 가치는 다른 돈의 실체를 곱씹었다.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이 총선 공약으로 등장했을 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꼭 25만 원이어야 하지. 줄어든 평균 실질소득이 그 정도인가, 물가 상승률을 가늠해 나온 수치인가.' 마침 근거를 대라는 요구도 여럿 있었다. 25만 원이 공약을 넘어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지금도 타당한 근거를 들어본 바 없다.
그 빈자리를 '25만 원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나' '250만 원, 2,500만 원은 왜 안 되나' 같은 냉소가 채운다. '불평등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당장 그만큼의 목돈이 절실한 경제적 약자의 목소리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의대 증원 2,000명'마냥 숫자의 함정에 빠진 꼴이다. 그뿐인가, 3고(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에 동고하는 애먼 국민을 둘로 갈라 놓았다.
13조 원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막히자 꺼낸 더불어민주당의 특별조치법 발의 카드는 국회의 정부 예산 편성권 무력화 우려에 위헌 논란으로 번졌다. 논란에 논란만 거듭 쌓고 있는 정쟁이 다시 민생을 외면하는 형국이다. 이 문제를 놓고는 또 얼마나 싸울 것인가, 지겹다.
정부의 고심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지난해 나랏빚은 1,100조 원을 돌파하며 국내총생산(GDP)의 50%를 처음으로 넘었다.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끌어 쓴 급전이 3월에만 35조 원이 넘는다. 민생지원금 예상 비용의 3배에 육박한다. 삼성전자 법인세 0원 등 올해도 세수 펑크가 불가피하다.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지 않는 한, 나라 곳간은 더 비게 된다.
시중에 풀릴 막대한 돈은 어떻게든 물가를 자극하는 요인이다. 물가를 잡기 위한 긴축정책 효과는 반감될 수 있다. 지원금 효과도 자신할 수 없다. 2020년 전 국민 대상으로 지급된 코로나19 재난지원금 14조3,000억 원 중 신규 소비 지출은 20~30%에 그쳤고, 소상공인의 체감경기는 반짝 개선 뒤 급격히 하락해 민간 소비 증가나 경제 성장 효과는 거의 없었다는 게 국책 연구기관(KDI) 분석이다. 이번 지원 수단으로 거론된 지역화폐의 한계를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나랏빚이 늘더라도 민생이 살아난다면 그 돈이 아까울 리 없다. 그래서 민생지원금 취지에는 공감한다. 그 선한 취지가 민생을 볼모로 잡는 정치 구호로 변질돼선 안 된다. 누구나 납득할 만한 명확한 근거와 합리적 분석이 필요하다. 당장 지원이 간절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식으로 도와야 하는지 면밀히 검토해 제시해야 한다.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다 주는 방식은 곤란하다. 절대 반대한다.
한정된 재정을 적재적소에 투입해 체감 효과를 극대화하는 정책을 설계하는 게 수권 정당의 실력을 보여 주는 진짜 방법이다. 부자 감세, 물가 관리 실패, 민생토론회 청구서 남발 등 경제 분야 실정을 거듭하는 이 정부와 차별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부·여당이든 야당이든 민생을 외칠수록 민생이 증발되는 역설의 현장을 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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