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스티브 승준 유는 여전히 한국에 오지 못한다. 그가 입영을 미루고 도미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2001년 말부터, 한국 정부는 그를 들이지 않는다. 23년째다.
원칙이나 일관성과 다소 거리가 멀었던 한국 행정의 전례를 볼 때, 유승준에 대한 당국의 태도는 유례없는 꼿꼿함의 연속이다. 법원에서 패소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입국을 허가할 생각이 없다.
이런 일관성은 유승준에게 농락당한 병무청이 독한 마음을 먹었기에 가능했다. 유승준은 미국에 가기 전 이미 입영통지서를 받은 상태(유승준 주장은 다르지만)였다. 그는 수차례 “병역 의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했고, 그 말을 믿은 병무청은 귀국보증을 거쳐 출국을 허용했다. 그랬더니 미국인이 돼 버렸다.
병무청 입장에선 선의가 철저히 기만당한 사건이다. 병무청은 “입영통지서를 받고도 미국 시민권을 딴 유일 사례”라며 분노했다. 그래서인지 유승준 문제를 대하는 병무청 태도에선 결기가 느껴진다. 역대 병무청장들은 정권 불문 한목소리로 ‘스티브 유’의 입국은 어불성설이라고 소리쳐 왔다.
심심찮게 터지던 연예인 병역비리가 줄어든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유승준 건에서 당국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대응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신성한 병역으로 장난치다 걸리면 평생 연예활동을 못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지금 시끄러운 김호중 사태도 비슷하다. 두 사건의 본질은 ‘영향력 있는 연예인이 공권력을 고의로 기만했다는 것’이다. 김호중은 사고 후 현장을 이탈했고, 뒤늦게 경찰에 나와 자신이 운전을 하지 않았다고 속였다. 김호중의 음주운전 관련 증언, 소속사의 조직적 범행 은닉 정황까지 나오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연예인 사건(이선균·지드래곤) 처리에서 상처를 입어 의기소침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엔 성격이 다르다. 공권력 기망이나 사법방해에선 물을 수 있는 죄를 철저히 물어야 한다. 특히 거짓진술 경위 확인이 중요하다. 제대로 수사하지 않으면, 음주운전을 하고도 현장만 벗어나면 된다는 인식이 퍼질 수 있다. 이 수사의 실패는 매우 나쁜 시그널이다. 차에 남아 단속 당하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한데 만만한 연예인에게만 더 가혹한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분들도 있겠다. 그러나 ‘이 연예인’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회원 수십만의 팬클럽을 거느리고, 전직 대검 차장을 변호인으로 쓰는 거물이다. 또 이런 사건에서 본보기를 세워 기강을 확립하는 것은 결국엔 ‘만인에게 평등한 법 적용’을 담보할 기반을 쌓는 일이다.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께서 해주신 벼리 강(綱) 자 설명은 이랬다. 벼리는 ‘그물의 위쪽 코를 꿰는 굵은 줄’이다. 벼리만 잡아당겨도 그물눈 하나하나에 손댈 필요 없이 전체 그물을 끌 수 있다. 여기서 기강(紀綱)이란 말이 나왔다. 기강을 잡을 땐 전체 구성원 모두의 규율과 법도를 단속할 필요는 없다. 벼리를 당기듯, 대표 사례를 공정·엄중하게 처리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피해자 고통을 외면하고 공권력 농락을 일삼으면 큰코다칠 수 있다는 것. 최소한 이 정도 원칙은 살아있어야 법치를 논할 수 있고, 법을 지켜도 손해 보지 않는 나라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기강은 이럴 때 잡는 거다. 지금은 경찰이 최선을 다해 벼리를 당길 때다. 힘껏.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