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을 최대한 실제와 똑같이 그리려고 노력했던 19세기 초상화가들에게 사진기의 등장은 절망이었다. 화가의 손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고 저렴하게 인물을 재현해 내는 사진기는 화가라는 직업을 금방 대체할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 좌절하거나 사진사로 전향한 이들도 있었지만, 몇몇 현명한 화가들은 빛을 재해석하는 새로운 화법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뭔가를 똑같이 그려내는 대신 시시각각 바뀌는 광선과 색채를 화가 고유의 감성으로 읽어내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네, 르누아르, 고흐 같은 인상파 화가가 나온 배경이다.
AI가 사람의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한 지금,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은 19세기 화가들이 경험한 그것과 비슷할 수 있다. 다만, 현대 사회에 미치는 AI의 영향력과 그에 대한 인간의 맹렬한 추종심은 그 옛날 사진기의 충격을 압도한다. 각종 번역 앱과 검색엔진, 통신기기는 물론, 세탁기∙냉장고 같은 가전제품, 자동차, 건축 등 AI 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건강, 식품, 예술∙문화 분야까지 어떻게든 AI와 엮어 제품의 우수성을 뽐낸다. 그런 광고를 보다 보면 안쓰러울 정도다.
AI의 오지랖은 200여 년 전 화가들의 생존을 위협했던 사진의 영역까지 뻗치고 있다. 사람들은 머리 속에서 상상한 그 무엇을 눈앞에 구현해 내는 데 있어 AI가 보여준 절차적 간소화와 스피드, 기대를 웃도는 ‘그럴듯한’ 결과물에 감탄한다. 명령어 몇 마디면 충분한 ‘극강’의 효율성을 앞세워 사진을 밀어붙이는 형국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 절경을 실사 촬영한다고 치면, 이동 경비부터 인력과 시간 등 소요되는 리소스가 상당하겠지만, AI는 한 문장의 명령어만으로 환상적인 항공뷰 영상까지 만들어주지 않나.
‘허구’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AI가 만든 이미지나 영상은 그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재생산하는 창의적 영역에서 활용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사진기가 고흐의 ‘자화상’보다 더 훌륭한 자화상을 만들어낼 수 없듯, AI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진실을 바탕으로 한 보도 사진∙영상을 대체할 수는 없다. 보도 사진은 실제 벌어진 역사의 한 순간을 현장에서 기록한 이미지다. 눈으로 봐야만 믿는 현대인의 속성도 사진이나 영상 속 장면이 진짜라는 믿음을 전제로 굳어져 왔다. 국가 권력을 포함해 그 어떤 인위적인 영향력으로도 보도 사진의 의미를 폄훼할 수 없는 것은 진실성 때문이다.
AI 기술이 날로 고도화하고 인간의 명령어 조합 역량이 발전할수록 AI 생성 이미지의 정교함은 진짜와 ‘똑같은’ 수준으로 수렴할 테니, 진실에 대한 위협은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다. AI에 대한 맹종이나 착각, 악의적 거짓말에 의해 보도 사진 또는 영상이 허구의 이미지로 대체될 때 뉴스의 기능이 마비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한국일보가 지난 4월 국내 언론 최초로 ‘생성형 AI 활용 준칙’을 제정하고, 현장 보도용 사진∙오디오∙영상에 AI를 이용한 어떤 요소도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이 같은 위험성에 대한 경계이자 진실 보도를 향한 다짐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진의 핵심 요소인 빛을 재해석해 작품에 적용한 것처럼 AI의 혁신적 기술을 진실의 바탕 위에서 활용할 때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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