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한국일보 창간 68주년을 맞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스티븐 M 월트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월트는 존 미어샤이머와 함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국제사회는 ‘힘센 놈’이 살아 남는 무정부 상태이고, 각 국가는 자국 이익을 추구한다는, 다소 냉소적인 이론인 신현실주의에 기반한 월트를 인터뷰한 시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00일 정도 되는 때였다.
월트의 진단은 냉정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전쟁은 교착 상태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전쟁은 인터뷰 뒤로도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미사일 공방과 참호전으로 사상자만 늘고 있다.
월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확장주의 야욕을 전쟁 원인으로 꼽으며 비판했다. 다만 미국 등 서방의 실책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합류를 선언한 2008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꼽았다.
“부쿠레슈티 선언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모두 (결과적으로) 나토 회원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큰 실수였다. 독일과 프랑스는 그 (합류 시도) 결정에 반대했지만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그들에게 어색한 타협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미국 정보 당국도 이 조치에 반대할 것을 권고했지만 부시 전 대통령은 이들의 충고를 무시했다.”
러시아의 위협을 피해 서방 품에 안기겠다는 우크라이나 등의 선택에 푸틴은 발끈했다. 2013년 유로마이단(친유럽) 봉기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등으로 우크라이나 상황은 악화했다.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군 전사자만 각각 최소 3만, 5만 명이 넘을 정도로 참혹한 상황은 나토의 동진과 러시아의 오판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자유주의, 이상주의 외교의 실패였다.
폭주하는 푸틴이 24년 만에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다. 지난해 9월 첫 만남에 이어 북러 정상은 더욱 밀착하고 있다.
북한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의의 성전’으로 규정했다. 무기 거래 및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지원 금지 등 2000년대 이후 구축해 온 유엔 대북 제재망이 무너졌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러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맺고 ‘침략당할 경우 상호 지원한다’는 내용까지 부활시켰다. 게다가 푸틴은 3월 인터뷰에서 “북한은 자체 핵우산을 갖고 있다”며 핵보유 용인 발언까지 한 상태다.
북한과 러시아는 군사동맹을 구축, 미국에 맞서는 새로운 ‘다극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냉전 종식 후 푸틴 러시아의 부활, 나토의 압박, 러시아의 반발과 전쟁 같은 나비 효과가 한반도의 안보까지 뒤흔드는 형국이다.
걱정되는 건 북한의 오판이다. 남쪽 탈북민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북한의 오물 풍선 발사,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군사분계선(MDL) 일대 지뢰 매설 경고 사격 등 국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 상황에 러시아 뒷배를 믿고 폭주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월트는 자유주의, 이상주의 시각의 안일함을 꼬집었다. ‘민주주의 확산과 경제 상호 의존 심화만 이뤄지면 러시아 같은 국가가 나타나지 않고 세계 평화가 이룩될 것’이라는 자유 진영의 헛된 믿음은 무너졌다.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현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서운 교훈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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