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의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6,194달러를 기록하여 처음으로 일본(3만5,793달러)을 제쳤다는 언론기사를 보았다. 엔화 약세의 영향이 컸다지만 경제 규모나 국민소득 관련 경제지표에서 우리가 일본을 앞선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닌가 싶어 사뭇 눈길이 갔다. 그러면서 우리가 경제면에서 경쟁하는 나라에 일본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일본과 비교하는 기사가 실리고 또 이런 기사에 눈길이 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중·고등학교 시절 일본과 관련한 이야기 가운데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이른바 '일본 침몰론'이었다. 일본 열도가 매년 조금씩 가라앉고 있어 언젠가는 일본 전체가 바닷속에 빠져 사라진다는 것이다. 과학적 당부나 근거를 따지기도 전에 왠지 고소하고 통쾌하여 그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일본 침몰론처럼 되기를 바랐던 것은 철없는 단견(短見)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일본 열도 전체가 침몰할 정도의 지질학적 격변이 발생한다면 한반도도 결코 무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둘째, 세계 지도를 펴고 태평양 한가운데서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보면 일본 열도 전체가 한반도의 방파제가 되는 형국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옛말처럼 일본 열도가 침몰하면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해일, 쓰나미 따위들을 한반도가 바로 직접 맞닥뜨려야 한다는 점도 놓쳤다.
그러나 일본만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보면 이번에는 한반도가 일본 열도의 방파제가 되는 모양새다. 실제로 중국 대륙에서 한족 왕조와 북방민족 왕조 사이에 정치적 격변이 생기면 그 여파가 한반도에 미치기 일쑤였는데 한반도가 외침을 당한 횟수가 1,000번에 가깝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반면 일본은 역사를 통틀어 중국 대륙 쪽에서 외침을 받은 것은 13세기 몽골의 침입 (그것도 태풍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간) 한 번뿐이라고 한다. 중국 대륙 쪽의 정치, 군사적 격변의 불똥이 한반도라는 방파제에 막혀 일본에는 거의 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 19세기 말 정한론이 대두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이르면서 한반도를 일본을 겨누는 단도(短刀)라고 본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대실패에 비춰볼 때 이는 착각이거나 망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방파제를 단도로 봤으니 말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한 과거사 문제의 앙금 때문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본에 대한 태도의 선택지는 반일과 극일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명색이 이웃 나라인데 관계의 선택지가 반대 아니면 싸워 이기는 것뿐이라면 왠지 서글프고 답답하다. 한국과 일본이 알게 모르게 서로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는 데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많은 전문가들이 한일 관계의 전범(典範)이라 여기고 한일 관계가 경색되었을 때 여기서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하는 문서가 있다. 1998년 김대중 오부치 선언이다. 여기에 나오는 평범하지만 탁견(卓見)임에 분명한 한 구절을 음미해본다. "양국 정상은… (양국의) 협력관계가 서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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