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영남 광동 ⑤포산시 조묘와 남풍고조
광저우에서 지하철을 타고 포산(佛山)으로 간다. 부처를 지명으로 쓴 까닭이 있다. 도시 약칭도 선(禪)이다. 당 태종 시대인 628년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신비한 금빛이 번쩍거려 주민들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땅을 파니 동으로 만든 불상 삼존이 나타났다. 광저우와 하나로 묶으려는 계획에 따라 광불선(廣佛線)이 연결돼 있다. 서울에서 얼추 안양 방향과 거리다. 조묘(祖廟) 역에서 내린다. 패방 양쪽에 목일(沐日)과 욕월(浴月)이 보인다. 해와 달이 목욕을 한다는 말인가? 낮과 밤 모두 광채로 뒤덮는 공간이다.
건물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 조묘 영응사
안으로 들어서니 높이 3.7m, 너비 12m의 쌍룡벽이 빛나고 있다. 구름을 껴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화룡(火龍)과 바다를 헤치고 뛰어오르는 수룡(水龍)이다. 도자기로 구운 작품이다. 포산 스완진(石灣鎮)에서 출토되는 토양으로 생산한다. 명나라 이후 4대 명진(名鎮)인 까닭은 도자기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불은 붉게, 물은 파랗게 치장했다. 몸과 수염, 비늘과 발톱도 서로 다르게 색칠했다. 현란하고 눈부신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상이다.
북송 시대 건축된 도교 사원으로 북방의 진무대제를 봉공한다. 중원에서 영남으로 남하하며 북제(北帝) 숭배 신앙도 왔다. 치수를 관장하는 신이다. 주강 삼각주 일대는 수재가 흔하다. 명나라 경태제 시대에 황제가 영응사(靈應祠)라는 작위를 내렸다. 여러 가문이 모여 함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을 관이 주도하게 됐다. 정면 지붕 용마루에 보주(寶珠)가 빛나고 양쪽으로 오어(鰲魚)가 입을 벌리고 있다. 도자기로 꾸민 고사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지붕에 광서기해(光緒己亥)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1899년이다. 무술정변 이후 서태후가 광서제를 폐위하려는 시도로 정국이 불안했다. 멀리 영남 땅에서는 조묘를 중건하고 화려하게 지붕을 수놓았다. 용마루 끝에서 용과 봉황, 새와 꽃을 한 입 가득 담을 듯 오어가 자리잡고 있다. 봉황이 무대 위에서 비상하려는 몸짓으로 앉아있다. 무대극이 펼쳐지고 관객도 슬며시 위치한다.
3층 누각에 영응(靈應) 패방이 우뚝 서 있다. 처마가 하늘로 솟아오를 듯한 기세다. 붉게 칠한 두공이 겹겹이 받치고 있어 더욱 선연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맨 위층에는 세로로 성지, 아래는 가로로 영응 글자가 있다. 뒷면 위에는 유제(諭祭), 아래에는 성역(聖域)이다. 제례에 대한 유지를 내린 성스러운 공간이다. 주홍색 나무 판자에 도금해 선명하기 그지없다. 녹색 도자기 기와가 덮고 있어 전체가 휘황찬란하다.
앞쪽으로 만복대(萬福臺)가 보인다. 청나라 순치제 시대에 건축된 무대로 영남에서 가장 오래됐는데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여섯 칸으로 구분된 금칠 목조가 반짝거린다. 위 중앙에는 복록수, 아래 중앙은 조조가 동작대에서 베푼 연회를 새겼다. 18나한 중 강룡나한과 복호나한, 도교의 팔선이 두루 등장한다. 용과 봉황을 그린 휘장이 걸려 있고 위쪽으로 출장(出將)과 입상(入相)이 적힌 문이 있다. 나가면 장수이고 들어오면 재상이니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뜻한다. 배우가 들락거리는 문이다. 도금한 목조로 배경을 꾸며 마치 조명처럼 비춘다.
패방 뒤로 연못이 나오고 양쪽에 석사자 한 쌍이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 바로 옆으로 오른쪽(동쪽) 종루와 왼쪽(서쪽) 고루가 배치돼 있다. 전통 건축양식에서 종과 북을 둔다. 아침에 종을 치고 저녁에 북을 두드린다. 궁전이나 사찰에 흔히 나타나며 고성 거리에서도 볼 수 있다. 봉긋한 아치문이 양쪽에 있다. 종루 쪽에 숭경문(崇敬門), 고루 쪽에 단숙문(端肅門)이다. 문 위에 석회를 재료로 볏짚과 종이를 배합한 회소(灰塑) 공예로 꾸몄다.
숭경문에 단골로 출동하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삼결의가 보인다. 단숙문에 가까이 다가가니 세월을 머금었지만 울긋불긋한 색감이 살아있는 공예가 나타난다. 자태가 풍성한 황제와 거울을 들고 있는 여인이 보인다. 인물의 옷과 동작은 물론이고 나무와 정자, 돌과 잎사귀도 세밀하게 다듬었다. 당명황유월궁(唐明皇遊月宮)이라 불리는 예술품이다. 당나라 현종이 중추절을 맞아 궁궐에서 보름달을 관람하는 장면이다.
전전(前殿)으로 들어간다. 당대 조정의 제례 표본이라는 국조기전(國朝祀典)이 걸렸다. 상당한 예우를 하게 된 까닭이 있다. 명나라 정통제 시대에 죄수 100여 명이 광저우 감옥을 탈옥했다. 왕을 자처한 황소양을 수령으로 10만 명이 참여한 농민 민란으로 발전했다. 지역 노인 22명이 조묘에 지휘부를 세우고 주민을 모아 토벌에 앞장섰다. 정규군과 합세해 토벌에 참여했다. 민란이 끝나자 조정은 조묘의 공로를 치하했다.
유리로 감싼 2층 구조의 조각품이 있다. 길이가 4m에 이르는데 눈부시도록 화려하고 여러 인물이 조각돼 있다. 청나라 광서제 시대에 제작한 신안(神案)이다. 신비한 ‘안건(案件)’이 아니라 긴 나무판을 말한다. 고급 가구에 쓰이는 티크나무(柚木)를 소재로 투각 후 도금한 작품이다. 양쪽 끝은 용, 봉황, 호랑이, 박쥐가 있고 제작한 사람과 장소를 새겼다. 1층은 당나라 태종의 친동생 이원패가 말을 굴복시키는 복룡구(伏龍駒) 장면이다. 날뛰는 말은 민간에서 유럽인을 지칭한다. 2층은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한 자객이 있다.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이다. 시위가 형가를 살해하는 장면까지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안쪽 들보에 진거단홍(辰居端拱)이 걸려 있다. 묵직하고 반듯한 글자에 금박을 붙여 눈에 확 띈다. 낙관을 보니 함풍 원년 11월 길일(榖旦)에 조각했고 광서 25년 11월에 복각(重刻)했다. 잠화승초중신(簪花勝醮眾信)도 적혀 있다. 꽃을 머리에 꽂고 훌륭한 제례를 충심으로 받든다는 뜻이다. 제왕이 거주하는 땅에서 단정히 앉아 두 손을 마주 잡고 경의를 표시한 메시지다. 아마도 무위이치(無爲而治)를 비유한 듯하다. 자연의 순리에 맡겨 천하를 다스리는 통치 철학을 담았다.
조묘의 정전(正殿)은 자소궁(紫霄宮)이다. 충성과 정의로 큰 명성을 지닌 요지라는 충의홍명중지(忠義鴻名重地)가 걸렸다. 명나라 경태제 시대인 1453년 설치했다. 청나라 가경제와 중화민국 시대에 다시 만들었다는 낙관이 있다. 천자의 말씀이라는 옥음(玉音)도 보인다. 사자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향로가 정면에 놓여 있다. 광서제 시대인 1899년 포산의 한 유명한 약국이 출자해 만든 청동 제기다.
청동 향로 뒤로 제단이 놓여 있다. 다섯 개의 제기가 세트처럼 모인 오공(五供)이다. 제기마다 놓이는 물품이 다르다. 가운데 향로를 기준으로 양쪽에 뾰족한 촛대(燭臺)와 네모난 화고(花觚)가 보인다. 향을 비롯해 꽃, 등, 물, 과일이 공품으로 사용된다. 모두 다섯 개가 받침대라는 오구족(五俱足)이다. 오헌(五獻)이라고도 한다. 참회를 구하는 마음을 품고 망자가 순조로이 승천하길 바라는 의식이다.
제단은 신안으로 꾸몄다. 좁다란 2층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등장한다. 삼국시대 이후 진(晋)으로 왕조가 바뀌는 혼란한 시기에 세속을 벗어나 술이나 마시며 올곧은 말로 지내던 은사다. 아래는 설강반당(薛剛反唐) 고사다. 당나라 시대 설인귀의 손자가 실수로 황태자를 죽게 만든다. 390명에 이르는 친족이 모두 참수당하나 혼자 도피한다. 후일을 도모하다가 무측천 정권에 반기를 들고 당나라 왕조를 회복시키는 데 기여한다. 무대극의 인기 레퍼토리다. 백성을 위해 화근을 없앤다는 위민제해(爲民除害) 깃발이 나부낀다.
종이처럼 가볍고 돌처럼 굳건한 건칠협저(乾漆夾苧) 조각상이 보인다. 나무를 깎아 만들고 옻칠과 모시로 거듭 도포해 만든다. 여의를 든 문신과 무기를 잡은 무관으로 나눠 모두 20기가 수호신처럼 도열해 있다. 크기도 서로 다른데 1.1m가 가장 작다. 실제 신장과 비슷한 1.8m도 있고 2.6m로 과장된 몸집도 있다. 뒤쪽에는 눈을 부라리고 우락부락한 괴수가 수두룩하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시대 처음 제작됐고 보수를 많이 거쳤다. 모두 허리를 굽힌 채 북제(北帝)에 대해 깍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북방의 신인 북제의 동상이 앉아 있다. 중량이 2,500kg, 9척 5촌으로 대략 3.16m 높이다. 제왕의 존엄을 상징하는 구오지존(九五之尊)를 따랐다. 9는 지고무상한 극한이며 5는 음양에서 중용의 도리다. 천상의 사방을 나눠 지키는 청룡과 백호, 주작과 현무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진무현천상제(真武玄天上帝)라 부르기 시작했다. 명나라 경태제 시대에 제작됐으며 보기 드물게 웅장한 규모다.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환하게 비추는 배광과 매서운 듯 온화한 눈매가 야릇하다. 가까이 보니 신령스러워 범접하기 어렵다.
500년 꺼지지 않은 도자기 가마, 남풍고조
버스를 타고 30분 동남쪽으로 가면 남풍고조(南風古灶)가 있다. 조묘의 쌍룡벽에 새긴 도자기 생산지다. 북송 시대부터 조공하는 도자기 굽는 가마를 용요(龍窯)라 했다. 하얀 담장에 황룡이 노니는 벽화가 보인다. 명나라 정덕제 시대인 16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500년이나 불꽃을 피우고 있다. 시설도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땔감을 사용하는 가마로는 기네스 기록에 오를 만큼 오래됐다. 굴뚝 위로 연기가 살포시 파란 하늘로 사라지고 있다. 야트막한 산세에 기대어 층층이 34.4m에 이른다. 남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한여름이면 산들바람이 불어온다고 한다.
징더전이 도자기로 유명하지만 채색 및 광택 도자기벽돌을 가장 먼저 만든 가마다. 마치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한 ‘남풍고조’ 필체라 뜨거운 기운이 솟는다. 깨알 같은 글씨로 가마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가마를 관장하는 조신(灶神)도 온몸에 화염을 두르고 노려보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옥황대제가 작위를 내리며 모든 집안의 부뚜막을 지키라 했다. 부뚜막이나 가마나 불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가마 끝자락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약 400년 동안 몹시 뜨거운 가마의 온도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신용(神榕)이라 부른다. 높이가 21m인데다가 신비롭다 생각했던지 하늘과 잇닿아 있다는 참천(參天)이라 한다. 가마와 동반자인 반요(伴窯)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일본군이 가마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나무에 걸려 터져버렸다. 가마는 무사했고 나무는 반파됐다. 용케 다시 살아나 싱싱하게 자랐다. 신통하기조차 하다. 약 10m 떨어져 신기한 나무가 또 있다. 흙이 없는데도 잘 자란다. 무지생근(無地生根)이라 부르는데 모두가 신용의 자손이라 생각한다.
주변에 명청시대 고건축물과 민가가 많다. 골목은 문화거리로 변해 관광 상품이 흔하다. 고택은 도자기 파는 가게로 변해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나름 유명한 도예가의 작업실도 꽤 많다. 한적한 거리를 따라 걷다가 카페에서 차나 커피를 마셔도 된다. 아기자기한 공예품도 눈에 자주 밟힌다. 오랜 역사를 지닌 가마터 주위로 따뜻한 훈풍이 부는 듯하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오래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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