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0주년 기획 : 한일 맞서다 마주 서다]
<3> 혐오 줄었지만, 역사도 잊힌다
한국 좋아하지만 식민지 역사 배운 적 없어
한류로 관심 가진 뒤 친구나 드라마로 알아
한국인들도 과거사 교육 부재에 관심 줄어
"승패에서 벗어나 피해자 구제에 주목해야"
편집자주
가깝고도 먼 나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한국과 동등하게 마주 선 관계가 됐다. 활발한 문화 교류로 MZ세대가 느끼는 물리적 국경은 사라졌고, 경제 분야에서도 대등한 관계로 올라섰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한일 관계의 현주소와 정치 외교적 과제를 짚어본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였다고요?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데..."
(일본 세이부엔 유원지에서 만난 20대 청년)
6월 24일 찾은 일본 사이타마현 세이부엔 유원지. 쇼와(昭和·히로히토 일왕의 연호) 시대(1926~89)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1950, 60년대에 있었을 법한 파출소, 양복점, 과일가게, 생선가게 건물이 줄지어 서 있고, 당시 의상을 그대로 재현한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아톰(1952~68년 연재)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불렀다.
이곳은 이른바 쇼와 레트로(복고풍)를 재현한 일본의 테마파크다. 복고풍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 감성을 수용해 2021년 재개장했는데, 평일에도 약 500명이 찾는다고 한다.
여기 젊은이들은 부모와 조부모에게만 전해듣던 쇼와 시대를 어떤 세상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일본이 경제적으로 잘나가던 고도성장 시대의 향수를 듬뿍 불러일으키는 키워드가 바로 쇼와다. 도쿄에서 온 치바(24)는 "최근 레트로 카페나 쇼와 의상을 빌려주는 렌털숍이 유행하고 있다"며 "복고풍을 즐기고 싶어 일부러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시절인 빅토리아(여왕 재위기 1837~1901년) 시대를 따라한 듯 '빅토리아'가 적힌 카페 간판도 눈에 띄었다. 스즈키(25)는 "할머니 집에 있던 식기나 물품들이 생각나 재밌다"고 말했다. 일본 젊은이들은 상점 곳곳에 걸린 당시의 옷과 머리장식을 신기한 듯 살펴보고, 일본 순사가 도둑을 잡는 연기자들의 공연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쇼와시대 밝은 면만 떠올리는 젊은이들
그러나 일본 젊은이들은 쇼와 시대의 밝은 면만 기억하고 있었다. 가혹한 한반도 식민지배, 하와이 침공에 따른 태평양 전쟁, 731부대와 난징학살 등 각종 전쟁 범죄,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위안부·노동력 강제 동원 등 쇼와의 어두운 면을 아는 청년은 없었다. 본보 기자가 '쇼와 시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질문하자 치바는 "배운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며 고개를 저었다. 히로키(29)는 "식민지 얘기는 역사 시간에 배운 적이 없다"면서 "위안부나 강제동원이라는 말은 뉴스에서 들어본 것 같지만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중장년 관광객들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시기였다"거나 "아톰 등 애니메이션이 발달한 시대"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아픈 과거를 기억하는 건 그때를 살았던 노인들뿐이었다. 오오키 사츠(86)는 쇼와 시대를 생각하면 '전쟁과 식민지'가 떠오른다고 답했다. 그는 "이때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와 고생을 많이 했다"며 "전쟁이 나면 시민들이 정말 힘들기 때문에 다신 일어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류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도 양국의 아픈 역사에 대해 잘 모르긴 마찬가지다. 한국 음식점과 화장품 가게, 한글 간판이 즐비한 도쿄 신오쿠보를 찾은 치히로(21)도 "한국이 쇼와시대에 식민지배를 당했었냐"고 반문하며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오토와(22) 역시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며 의아해했다.
이처럼 일본의 젊은 세대는 학교에서 '어둡고 부끄러운 과거'를 배우지 않는다. 따로 공부를 하거나, 어떤 계기가 있어서 찾아봐야만 쇼와 시대의 부정적인 대외 관계를 겨우 배울 수 있는 정도다. 오모리(19)는 "한국에 관심이 생긴 뒤 올해 대학에서 '한국문화 이해'라는 선택 과목을 듣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히로키는 "한국인 여자친구를 사귄 뒤 독도 문제를 알았고,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일본이 나쁜 짓을 했다는 걸 처음 알아 가슴이 답답했다"고 전했다.
일본은 왜 반성하지 않나
전문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인 사이에서 식민 지배나 전쟁 범죄와 관련한 '가해자 인식'이 사라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교수는 "일본에선 8월 15일을 '패전'이 아닌 '종전' 기념일로 부른다"며 "사회적으로 가해에 초점을 맞춘 시각 자체가 없어지다 보니 식민지가 일본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고회로가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쇼와 시대에 관해서도 서구 열강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 자부심을 가진 시기지, 한반도나 중국 등 침략전쟁과 연결짓진 않는다"고 전했다.
역사학 전공자인 정영환 메이지가쿠인 대학 교수 역시 "1945년 이전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있고, 일본이 잘못은 했더라도 '지금껏 계속 사과했는데 한국·중국이 끝없이 문제를 제기한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도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일본인들이 △왜 일본 정부가 1980년대까지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는지 △왜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피해자들이 직접 소송을 걸어야 공론화가 됐는지 궁금해해야 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으니 과거사 해결이 더욱 요원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사 방치와 무관심은 피해자 격인 한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한국 제도권 교육에선 일제강점기 기간 피해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다루면서도, 위안부나 강제동원 재판 등 전후 과거사에 관한 교육은 부족하다. 역사 교과서 제작에 참여했다는 교사 김종민씨는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 평화 부분은 맨 마지막 단원의 마지막 주제다"라며 "시험기간 후에나 가르치고 비중도 없다 보니 시간상 건너뛰는 교사들도 많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과거사 청산과 반성을 위해선 일단 과거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정영환 교수는 "역사를 잘 모르면 관동대학살(1923년) 당시 조선인이 황태자를 죽이려 했고 이를 막기 위해 처형했다는 왜곡된 극우들의 인식이 힘을 받고, 더 나아가 현재 재일동포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세계사적으로도 일본이 식민지배와 군국주의를 진정으로 부정하고, 꾸준한 문제제기와 책임자 처벌을 통해 냉전 시대와 다른 가치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일 관계가 누가 이기고 지는 '승패'의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의 혐오를 넘어 지금 양국이 맞이한 본질적 문제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가타 교수는 "한일 문제에선 한쪽이 이기면 한쪽이 지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상황에선 적극적으로 지는 입장을 취하기 쉽지 않다"며 "양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근본적인 '피해자 구제' 부분에 초점을 맞춰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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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국경이 사라진 문화 영토
일본이 무시 못하는 '큰 손' 한국
혐오 줄었지만, 역사도 잊힌다
갈등과 공존, 기로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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