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서재]
법치의학자 윤창륙의 무등산 서재
헌책방 쏘다닌 책벌레, 38년간 사건현장 누벼
책 위한 집 짓고 '숲속 작은 도서관' 꿈 한 발짝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광주 무등산국립공원을 등지고 있는 '추사재(追思齋·생각을 따라가는 집)'는 주객이 전도된 집이다. 법치의학자인 윤창륙(69) 조선대 치과대 명예교수가 사람이 아닌 오로지 책을 위해 지었다. "여기가 보전녹지지역이라 건폐율이 낮아요. 총 70평에 3층집인데요. 은퇴하고 살기에는 크죠. 무릎도 안 좋은데 굉장히 불편한 집이에요. 그래도 별수 있나요. 책 때문에…" 그는 이 집의 명당자리인 맨 아래층을 책에 내줬다.
2만5,000권 책을 위한 집 '추사재'
책의 하중을 고려해 반쯤 지하로 내려앉게 설계한 1층 서재는 사방의 벽면이 1만8,000권의 책으로 빼곡했다. 말 그대로 책이 숲을 이루고 있다. 책을 최대한 많이 꽂기 위해 층고는 4.5m나 된다. 창은 천장 바로 아래 나 있다. 책을 훼손하는 햇빛이 닿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2층과 3층 생활공간 곳곳에도 책이 수두룩이 쌓여 있다. 어림잡아 7,000권 정도. 이 집을 짓기 위해 윤 명예교수가 읽은 건축 책만 600권이다. 좋아하는 술과 개에 관한 책도 상당수다. 그는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일단 책 100권은 읽고 보는 못 말리는 다독가다.
1993년 집에 불이 나 책 8,000권을 잃고 난 이후 서재의 서가는 "그때그때 보고 싶은 책들로 채워"놨다. 역사와 문학 도서가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 시집만 1,000권 넘게 있다. 그는 "지구상에는 양서도 악서도 없다"며 "포르노그래피부터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까지 다 읽어 보라"고 권한다.
유독 눈에 띄는 건 책꽂이 한편을 점령한 죽음에 관한 책들이다. 책 편력에도 직업병이 반영된 걸까. 그는 한국에 10명도 안 된다는 법치의학자다. 치아를 보고 시신의 신원을 식별한다. 죽음의 현장을 38년간 누볐다.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대구 지하철 화재, 세월호 침몰까지 사고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강단에서 은퇴한 지금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촉탁 부검의로 일하고 있다. 어디든 부르면 달려간다.
"'개인 식별'은 내가 기네스북에 오를 거다라고 할 정도로 많이 했어요. 전 세계에서도 우리나라의 법의학은 최고 수준이고요." 그가 유족 품에 돌려보낸 시신만 7,500여 구에 이른다. 알고 보면 '불명예'다. "가장 빨리 산업화하고, 가장 빨리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난 무수한 사건의 축적물"이기 때문이다.
"뭐든 시작 전에… 딸 이해하려고" 책부터 펴는 사람
윤 명예교수는 어릴 적부터 읽고 쓰는 걸 좋아했다. 다독가이자 장서가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는 "아버지보다는 책을 조금 더 많이 읽겠다는 목표를 일찌감치 갖게 됐다"고 했다. 배낭을 메고 전국 여행을 혼자 다닌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어느 지역을 가든 헌책방 순례에 나섰다. 책을 사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서가를 손바닥 보듯 해 손님에게 사장 대신 책을 찾아줄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당시 수집했던 책 대부분이 불탔는데 그중에는 이인직(1862~1916)의 '혈의 누·귀의 성' 1907년 초판본이 있었다. 윤 명예교수는 "대전에서 헌책방 주인이 책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헐값에 팔아서 우연히 구한 책이었다"며 "집에서 모시듯 했는데 불타버려 정말 아깝다"고 했다.
윤 명예교수는 한번 꽂힌 책은 읽고 또 읽는 편이다.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정인보 등의 짧은 글을 모은 '근대한국사논선'(이기백 편저)은 고교 2학년 때부터 50번도 더 읽었다. 누런 종이에 한자가 세로쓰기된 오래된 책이지만 "읽을 때마다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자꾸 읽는다"고 했다.
세계적 석학 노엄 촘스키와 한국 불교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정찬주의 작품은 모두 찾아 읽는 전작주의 독서를 한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코나아이 시스템다이내믹스팀이 저술한 '대한민국의 붕괴'다. 그는 "우리나라 쇠퇴의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인구 감소이지 않나. 그런데 둘째 딸이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고 해서 그 원인을 찾아보고 싶어서 읽는다"고 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제자들에게 윤 명예교수는 "호흡이 짧은 시나 수필을 읽으라"고 권한다. '대통령 박근혜 탄핵 사건 선고 결정문'은 50부를 복사해 제자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내용보다는 논리를 배우고 싶다면 이걸 꼭 읽어야 한다"며 "논리 전개의 교과서"라고 탄복했다.
"치의대 입학은 후회"… 인생 바꾼 법의학 수업
윤 명예교수가 살면서 후회하는 건 딱 하나, 치의대에 들어간 것이다. 아버지의 권유에 "효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4년제인 줄 알고 치의대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예과 1학년 치의학개론 첫 수업 때 담당 교수가 "치과학을 뜻하는 '오돈톨로지(odontology)'에서 '돈'은 'money'다. 너희들 앞으로 생활 걱정 없고 시집 장가 잘 갈 거다"라고 하는데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건 내가 갈 길이 아니다" 싶었다. 2년 과정 예과를 4년이나 다녔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었다. 3학년 1학기 때 김종열 선생의 법의학 강의를 듣지 않았더라면 윤 명예교수는 신문기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강의를 듣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며 "법의학을 하겠다 마음먹으니 그동안 치과 공부를 안 한 게 후회스러웠다"고 했다. 법의학을 전공한 후 군의관 복무까지 마쳤는데 갈 곳이 없었다. 선택지는 국과수 아니면 대학이었는데 당시 국과수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유학을 준비하던 중 조선대와 연이 닿았다. 아내와 자녀는 서울에 두고 1989년 혈혈단신 연고도 없던 광주로 향했다. 3~5년만 머물다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천리 도망은 가도 팔자 도망은 못 간다'고 눌러앉게 됐다. 그는 2021년 2월 조선대에서 정년퇴임했다.
"사인 파헤치다 사명감은 절로"… 마지막 꿈은 도서관 여는 것
법의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윤 명예교수다. 그는 "의학과 치의학이 생명 존중의 의학이라면 법의학은 인권 존중의 의학"이라며 "죽은 사람과 모의 소통하는 법의학자로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고 얻는 성취감 그 이상을 내 가슴이 느낀다"고 했다.
국가적 트라우마가 된 세월호 참사와 대구 지하철 참사는 그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2014년 4월 16일 조선대 이사회 정상화를 촉구하며 삭발 투쟁 중이던 윤 명예교수는 TV로 '세월호 전원 구조' 자막을 똑똑히 봤다. 이후 전남 진도 팽목항에 내려가 두 달 반을 보냈다. "진물이 뚝뚝 흐르고 얼굴이 퉁퉁 붓고 악취가 진동하는 아들 딸을 끌어안고 볼을 부비는 부모들의 모습을 오롯이 지켜봤어요. 죽을 때까지 마음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여전히 '세월호 침몰 10년'이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에서도 그는 "참 많이 울었다." 16시간 동안 1,500도에서 달궈진 시신은 시커먼 재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같이 간 동료에게 '우리 욕심내지 말자. 사망자의 30%만 찾아서 유족에게 돌려드리면 신도 정말 잘했다 하실 거다'라고 했을 정도로 현장은 참혹했다"며 "세계 재난 역사상 가장 어려운 케이스였다"고 돌이켰다. 72일을 매달려 미확인 희생자 6명을 뺀 나머지 사망자의 신원을 밝혀냈다. 그는 "지하철 타고 가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었다. 왜 이들이 죽어야 했는지를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명감이요? 글쎄요. 저는 법의학이라는 학문이 그저 좋아서 한 거예요. 그런데 시신을 부검하고 사인을 파헤치다 보면 죽은 이의 억울함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명감이 묻어나옵디다."
윤 명예교수의 마지막 사명은 추사재에 있다. '숲속 작은 도서관'을 여는 거다. 이미 현행법상 도서관 등록 요건도 갖췄다. "제 진짜 꿈은 아이들이 편하게 오가며 책을 읽을 수 있게 이 집을 도서관으로 만드는 겁니다. 어때요, 이보다 더 책 읽기 좋은 환경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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