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포항 - 액티브 시니어의 시험대
편집자주
한국일보와 포스텍 사회문화데이터사이언스 연구소(소장 배영ㆍ이하 ISDS)는 액티브 시니어(액시세대)가 은퇴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지역이 어떤 곳인지, 액시세대를 불러들이기 위해 각 시·군은 어떤 노력을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지역을 찾아가 그곳에서 생활하는 은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또 양적 질적 조사 방법을 사용해 해당 지역의 장점과 약점을 분석해, 10회에 걸쳐 매달 네 번째 목요일에 게재한다.
포항은 산업화를 거치며 경상북도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현재는 에코프로를 비롯한 이차전지 주요 기업들이 들어서며 첨단 기술도시로 발돋움 중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1970년대 들어선 포스코의 그늘이 넓고 깊다. 지난 50년 포항의 대부분 영역은 포스코와 포스코 이외로 구분될 정도였고, 많이 퇴색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력한 기준이다. 본기획의 주제인 포항 액티브 시니어(액시세대)들에게는 더 그렇다. 포항의 액시세대는 포스코 은퇴자를 빼고 설명하기 불가능할 정도다.
액티브 시니어란
1980년대 미국 심리학자 버니스 뉴가튼은 ‘50~75세로 경력과 경제력 및 왕성한 소비력을 갖춘 세대’를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라고 정의하면서 ‘어제의 노인과 다른 오늘의 노인’이라고 범주화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액티브 시니어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은퇴 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대체로 1964~74년생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을 ‘2차 베이비 붐 세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1955~63년생인 ‘1차 베이비 붐 세대’와 비교하면, 고도성장기에 성장한 덕에 고학력과 노후 준비가 잘된 이들의 비중이 높다. 액티브 시니어의 표준화된 한국어 번역이 아직 없어, 기획에서는 ‘액티브 시니어’로 쓰되, ‘액시세대’로 줄여 부른다.
포스코 은퇴자는 전문적 기능이나 지식을 갖추고, 부족하지 않은 노후 자금을 축적해 경제력과 소비력을 갖춘 이상적인 액시세대 표본이라 할 만한 집단이다. 우리나라 1차 베이비 붐 세대 시작인 1955년생이 은퇴한 2015년 이후 포항은 액시세대의 주요 터전이 되고 있다. 포스코는 2001년부터 은퇴자의 재취업지원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지난해에는 포스코 퇴직자 593명 중 절반이 넘는 은퇴자들이 재취업에 성공했다. 이렇게 몇 년간의 재취업 이후에도 상당수의 은퇴자는 포항에 남는다. 한 포스코 은퇴자는 “고향이 어딘지 상관없이 포스코 근무자의 20% 정도는 은퇴 후에도 포항에 계속 거주한다”고 말했다. 타지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더라도 인생의 상당 기간을 포항에서 보내면서 쌓인 인맥과 인연이 은퇴 생활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동질적인 대규모 은퇴자 공동체에는 긍정적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포스코 특유의 수직적 문화는 은퇴 이후에도 남아 은퇴자 공동체에서 불화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 포스코 출신이 아닌 은퇴자들과의 거리감도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역대학과 액시세대 경력 되살릴 방안 모색을
왕성한 활동력을 지닌 은퇴자들은 취미 활동을 넘어 자기 경력을 활용한 사회 공헌이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지만, 이들이 보람과 성취감을 느낄 기회를 찾기 어렵다. 다른 포스코 출신 은퇴자는 “1년 이상 근속 근로자에게 보장된 연차나 상여금 적용에 은퇴자에 대한 예외 조항을 만들어서라도 은퇴자들이 자신의 경력을 활용할 안정적 직장을 찾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액시세대 자아실현의 꿈을 실현할 통로가 마련된다면, 이는 포항 지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다. 포항 지역 기업과 대학이 협력해 은퇴자를 위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면, 외지 액시세대도 불러들일 수 있다. 또 대학이 은퇴자가 평생 쌓은 숙련 기술을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하도록 돕고, 교육을 이수한 은퇴자를 기업에 공급하면 지역의 인재 부족도 해결할 수 있다.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방 대학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미 이와 같은 목적으로 은퇴자와 대학을 연계하는 시설이나 마을을 조성하고 있는데, 이를 ‘대학 연계형 은퇴자 공동체(University Based Retirement Community·UBRC)’라고 부른다. 대학가에 시니어타운을 조성하고 입주자에게 대학이 문학 역사 IT 등의 다양한 수업을 제공한다. 국내에서도 2000년대 중반 대학과 시니어타운을 연계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액시세대 급증 추세에 맞춰 최근 광주 조선대와 부산 동명대에서 UBRC 사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텍 한동대 등 다수 대학뿐 아니라 이미 대규모 액시세대 공동체가 존재하는 포항이야말로 UBRC의 유망지역이다. 특히 제철 분야의 숙련된 지식을 지닌 액시세대가 많은 만큼 이들의 현장 경력을 살려 지역 기업을 돕는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도 용이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은퇴자를 산학협력 교수로 임명해 지역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을 돕는 울산대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도 있다.
포항 액시세대 인프라에 비해, 운영력 아쉬워
포스텍 사회문화데이터사이언스연구소(ISDS)가 개발한 ‘액티브 시니어 지표’를 통해 포항이 액시세대가 정주하기 위한 여건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는지 살펴본다. 먼저 ‘주거·이동 편의성’ 분야에서 포항은 전국 평균보다 높은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양로시설이 전국 평균보다 많고, 고령자 돌봄 서비스 이용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다만 식사 청소 세탁 등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노인 복지 주택은 거의 없었다. 이동 편의성을 살펴보면 2015년 KTX가 연결되며 다른 지역과 왕래가 편해졌다. 하지만 포항 시내의 이동은 여전히 불편한 것으로 나타났다. 버스 정류장 수나 택시 면허 대수 등 인프라는 전국 평균보다 많았다. 하지만 정작 버스 노선과 차량 등이 전국 평균에 못 미쳤다.
액시세대의 사회활동 여건을 평가하는 ‘문화·여가’ 분야에서 이들을 위한 포항시의 문화 프로그램과 활동 지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부족한 부분은 포스코 등 포항 소재 주요 기업들의 사회공헌으로 메우고 있다. 문화·여가 관련 시설 역시 전국 평균보다 부족하지만 고령 인구 대상 시설은 평균 수준이었다. 특히 노인여가복지시설, 평생교육기관, 취업지원교육기관 등은 잘 갖춰져 있다.
고령 세대 건강관리 여건을 살펴보는 ‘의료’ 분야도 대체로 전국 평균 의료 서비스와 비슷한 수준이다. 의료 관련 인프라는 전국 평균보다 많은 의료 인력과 병상을 갖추고 있었지만, 의사 수는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포항에서 가장 큰 병원들도 2차 의료기관이어서, 암 같은 큰 질환은 수술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포항에서 만난 은퇴자들이 포항에 살면서 가장 불안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포항은 공업도시이면서도 녹지 환경 인프라 평가에서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다. 도시 곳곳에 경관 녹지가 잘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2015년 4월 포항시를 관통하던 동해남부선이 폐선된 용지를 도심 녹지축으로 바꿔 하루 평균 3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포항의 명소 ‘철길숲’이 탄생했다.
하지만 2022년 포항 시민의 녹지 환경 만족도는 경상북도 최하위였다. 그 요인 중 하나는 공원 부족이다. 포항의 도시 공원 수는 전국 평균에 못 미친다. 특히 공원의 절대다수가 어린이공원이다. 포항의 도시 건설이 포스코 근무자의 생활 공간 위주로 진행되면서 자녀들을 위한 공간을 많이 배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포항도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포항시는 최근 어린이공원 중 일부에 고령층을 위한 맨발 산책로와 맞춤형 운동기구 등을 설치하고 있다.
문화 의료 주거·교통 녹지 등 4가지 분야를 종합해 볼 때, 포항은 액티브 시니어가 살고 싶어 할 만한 인프라는 부족하지 않게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운영 제도와 정책 등 서비스 영역에서는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은 미완의 도시라 할 수 있다.
이번 조사를 진행한 포스텍 배영 교수는 “은퇴자들이 각자 업(業)에서 축적한 역량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런 역량을 지나간 과거의 흔적으로 여기지 말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은퇴자 개인은 물론 우리 사회에도 커다란 에너지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료 정리: 전종석(포스텍 소셜데이터사이언스전공 박사과정), 류연수(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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