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양시 동안구 '뜻밖의 여행'
1층엔 상가, 2, 3층엔 주택
마당, 테라스, 발코니...숨구멍 많은 집
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단점 없는 땅은 없다. 좁은 골목마다 집과 빌딩이 촘촘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구도심에선 더 그렇다. 오래된 도시 한가운데 집을 짓기란 한계와 제약 속에서 방법을 찾는 도전이다. 경기 안양시 동안구에 자리한 상가주택 '뜻밖의 여행'(대지면적 163㎡, 연면적 175.7㎡)도 대지의 뚜렷한 결점을 안은 채 첫 삽을 떴다. 집은 인접한 왕복 12차로인 경수대로에서 보면 앞 건물에 가려져 출입문만 빼꼼히 보인다. 내부로 들어가려면 왼쪽 건물과 앞 건물 사이의 폭 2m, 길이 8m 남짓한 통로를 지나야 한다. 접근성이 높은 1층에 상업 공간을 계획했던 건축주로선 입구가 주둥이처럼 기다란 호리병 모양의 땅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건축주인 이은형(52) 윤장섭(55) 부부의 썩 내키지 않은 마음을 돌린 건 집 반대편의 전경이었다. 20년 넘은 2층 단독주택이 있던 자리였는데, 대로 반대쪽은 어린이공원과 맞닿아 시야가 트여 있었다. 이씨는 2층 테라스(현재 2층 거실)에서 벚나무를 본 순간 여기 살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결혼하고 쭉 이 동네에 살았지만 처음 와보는 뜻밖의 장소였다. 약 1년간 공사 끝에 완성된 3층 집에는 부부와 고2 아들 세 식구가 산다. 아내 이씨는 새 집을 지으며 동네 책방 운영을 시작했다. 1층은 1,600종 2,200권의 책을 들인 서점이고, 2, 3층은 가족의 생활 공간이다.
네모 반듯한 콘크리트 사이...삐딱한 눈썹 지붕
설계는 이씨가 알고 지내던 비그라운드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의 윤경숙 소장과 차주협 소장이 맡았다. 건축가로선 까다로운 과제였다. 건축주는 신축을 원했지만 건축법상 신축 시 요구되는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1층을 근린생활시설로 용도 변경도 해야 했다. 결국 신축 대신 증축·대수선 하기로 결정했다. 뼈대만 남기고 다 철거하는 대공사였다. 주차 문제는 "차 때문에 집을 포기하는 게 맞지 않다는 생각"에 한 대는 처분하고 남은 한 대는 인근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외관은 네모 반듯한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게 삐딱한 경사 지붕, 눈썹 지붕으로 계획했다. 건축비로 4억5,000만 원(인·허가 비용 포함)이 들었다. 윤 소장은 "땅을 매입한 상태에서 건축가에게 오는 경우가 많은데 법적인 고려를 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며 "기획 단계부터 건축가와 함께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구조 보강 장치가 1~3층 곳곳에 드러나 있는 게 이 집의 특징이다. 매끈함 대신 울퉁불퉁한 구조물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을 택했다. 2층 주방과 거실을 잇는 자리엔 지붕 트러스(지붕을 덮는 틀)가 그대로 모습을 보이고 3층 아들 방 천장의 브레이싱(건축물의 흔들림·변형을 막기 위해 대는 부재)은 아들이 고른 파란색으로 칠해 눈에 확 띈다. 1층 서점에는 엑스(X)자 모양의 브레이싱을 책장 인테리어로 영리하게 활용했다. 윤 대표는 "가리게 되면 천장이 낮아지고 답답해 보일 수 있어 구조물을 노출시키고 개방감을 줬다"고 말했다.
10초 컷, 직주일체 집에 살아보니
이씨는 안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곳에서 자란 호계동 토박이다. 애정 깊은 이 동네에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지역의 문화 구심점 역할을 하는 동네 책방의 가능성을 봤다. 전북 전주에서 동네 책방을 먼저 운영하던 지인도 "언니라면 잘 할 수 있다"며 응원했다. 결혼하고 15년 동안 아파트에만 살다가 집을 짓고 1층에 책방을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시작된 계기다. 지켜보는 남편은 걱정이 앞섰다.
"어렸을 때 집이 시골에서 가게를 했어요. 학교 다니고 한창 놀 나이에 아버지가 가게 좀 보라 그러는 게 싫더라고요. 몸이 매여 있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아니까, 아내가 유독 활발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데 걱정이 됐지요."
직장인의 꿈인 '직주근접'을 이룬 사람은 많아도 '직주일체'에 성공한 사람은 흔치 않다. 집과 직장이 한 곳에 붙어 있는 생활 3년차, 어땠을까. 이씨는 "한껏 게으름을 피워도 직장까지 10초 컷이라 아이도, 책방도 필요할 때 수시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남편 걱정대로 가끔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상이 주는 설렘과 재미가 더 크다. 단조롭지 않은 공간의 힘이다. "단독주택에 살면 꽃이 번갈아 피고 열매 맺는 걸 보면서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거든요. 물론 일이 많아요. 낙엽도 쓸어야 하고 눈도 치워야 해요. 그런데 그렇게 몸을 움직이고 계절을 경험하면서 살아 있다고 느껴요."
집의 하이라이트는 벚나무가 눈에 가득 들어오는 2층 거실이다. 거실에 넓게 난 창은 벚나무를 품은 어린이 공원을 차경(借景)한다. 바깥 풍경을 집으로 끌어들여 22평가량의 2층은 실제보다 넓어보인다. 시시각각, 사시사철 변하는 창밖 모습이 집 안을 생기 있게 만드는 건 덤이다.
책방에 반대하던 남편도 이제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변신했다. 눈썰미와 손재주 좋은 남편은 책방의 대부분 가구를 손수 만들었다. 책방에서 모임이 있을 땐 가끔 셰프로 변신해 요리도 한다. 기획해봄 직한 행사를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 이씨는 "공간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마당, 테라스, 발코니... 숨구멍 많은 집
50평이 안 되는 땅에 지은 집이지만 층마다 빈 공간, 여백이 하나씩 있다. 1층 서점이 어린이 공원과 맞닿은 부분에는 한옥의 대청 마루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은 마당이 있다. 2층에는 주방과 이어지는 테라스를, 3층 아들 방엔 발코니를 만들었다. 차주협 소장은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건물의 구멍"이라며 "특히 도시에서는 꼭 창문이 아니더라도 외부와 시각적, 물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종의 숨구멍인 셈이다. '뜻밖의 여행'은 지난해 경기도 건축문화상 특별상을 받았다.
실내 공간으로 꽉 채우기보다는 덜어내기를 선택했더니 일상에선 종종 뜻밖의 연결이 일어난다. 공원에서 운동하던 사람이 1층 마당에서 책장을 만든다고 톱질을 하는 남편에게 "뭐하고 계시냐"며 알은체를 하고, 북 토크를 진행하던 아내 이씨와 눈이 마주친 행인은 목례를 건넨다.
가게 문도 하루만 열고 닫는 팝업의 전성 시대, 건축주는 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사람들과 "책으로 교감하며" 살아가길 꿈꾼다. 이씨는 "최연소 단골 고객이 36개월 된 아이"라며 "그런 어린아이들이 커서 찾아왔을 때 '책방 아줌마 저 왔어요' 할 수 있는 동네의 정서적 언덕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일보의 '집 공간 사람(집공사)' 시리즈가 이번 편을 끝으로 휴재에 들어갑니다. 2017년 7월 12일 첫 회가 연재된 이후 8년 만입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들과 취재에 응해 주신 건축주, 건축가, 건축사진작가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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