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지원 문턱, 오랜 진단 방랑
희소질환 약값 2년치보다 더 든
의료공백 땜질용 건강보험 재정
편집자주
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들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초등학생 지민이는 태어날 때부터 신장과 심장, 장이 안 좋았다. 출생 전후 진단서에 생소한 병명들이 기록됐고, 수차례 수술을 받았다. 대장 전체와 소장 일부를 잘라낸 탓에 장 기능이 크게 떨어져(단장증후군) 만 5세 때 몸무게가 두 돌 아기 평균 정도인 12㎏밖에 안 됐다. 병원에 수시로 입·퇴원하며 정맥주사로 영양을 공급받아야 했던 지민이와, 매일 하루 3시간도 채 못 잤던 아내를 보다 못한 지민이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뒀다.
출생 후 4년 동안 지민이는 단장증후군 의료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선천성만 희소질환으로 인정돼 건강보험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타고난 다른 병들 때문에 수술로 단장 상태가 된 지민이는 대상이 아니었다. 퇴직금 3,000만 원은 5개월 만에 병원비로 다 썼고, 지민이네는 아파트에서 빌라로 집을 옮겼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든 수술 때문이든 장이 짧으면 기능이 떨어지는 건 매한가지다. 그런데도 선천성이냐 후천성이냐로 아이들 의료비 지원 여부가 갈리는 걸 납득하긴 어렵다.
40대 수진씨는 10대 때부터 자신을 괴롭힌 병이 뭔지를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알게 됐다.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 아이를 보며 혹시나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다 유전성 혈관부종이란 병을 찾아냈고, 또 병원을 물어물어 가서야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진료해본 의사가 드문 이 희소질환은 환자들이 평균 19년 동안 ‘진단 방랑’을 겪는다. 혈관이 붓는다는 뜻의 병명만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환자들은 툭하면 생사를 넘나든다. 장기가 부어올라 극심한 통증과 저혈압 쇼크 위험에 시달리고, 특히 후두가 부으면 산소 부족과 호흡 곤란으로 실신까지 한다.
딱 맞는 약이 있고, 국내 허가도 났다. 그런데 허가 후 4년이 다 돼 가도록 환자들은 약을 쓰지 못한다. 건강보험 가격이 결정되지 않아서다. 보험이 안 되면 1년에 2억~3억 원에 달하는 약값을 감당할 수가 없다. 보건당국과 제조사가 줄다리기하는 사이 희소질환 환자들은 생사를 오간다.
정부는 출범 초기 국정과제로 중증 희소질환의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올 초 발표한 제2차 건강보험종합계획과 제2차 희귀질환종합관리계획에도 그런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환자들이 체감할 만한 뚜렷한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지민이 어머니는 “아이들이 희망을 갖도록 어릴 때부터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했다. 수진씨는 “의사를 만나기조차 어려운 의료 현실이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희소질환 환자들은 간단한 수술이나 시술을 할 때도 협진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병을 아는 의사가 워낙 적어 원래도 협진이 쉽지 않은데, 의료공백 사태가 상황을 악화시켰다. 환자들 사이에선 희소질환을 앓는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간단한 수술조차 거부당했다거나, 수술 중 무슨 일이 생겨도 문제 제기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얘길 들었다는 사례들이 공유되고 있다.
지난달 말 정부는 의료공백 사태가 이어질 것에 대비해 건강보험 재정 약 2,000억 원을 의료 현장에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전까지 7개월간 의료공백에 따른 비상진료체계를 유지하는 데 쓰기로 한 재정도 이미 1조9,000억 원이 넘는다. 건강보험에서 2023년과 2022년 희소질환 의약품에 지출한 총액은 각각 약 8,000억 원과 6,000억 원이다. 두 해 액수를 합쳐도 비상진료체계 유지에 든 비용에 못 미친다. 의정갈등이 없었다면 희소질환 환자 단 몇 명이라도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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