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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고인이 된 배우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1987년의 기억이 생생하다.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에서 한국 영화가 본상, 그것도 주연상을 받은 건 기적에 가까웠다. 비영어권 변방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마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시상식조차 참석 않은 강수연은 대리수상을 해야 했다.
□누군가 뚫으면 길은 열린다. 전도연이 칸(2007년)을, 김민희가 베를린(2017년)을 접수하며 3대 영화제를 차례로 품에 안는다. 그뿐인가. 칸은 아예 한국 영화에 문을 활짝 열어줬다. 감독상(박찬욱) 남우주연상(송강호) 그리고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영화 '기생충')까지. 그 콧대 높던 오스카도 한국 영화에 미소를 지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2020년 무려 4관왕을 안겨줬고, 이듬해 윤여정(영화 '미나리')에게는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건넸다.
□K팝과 드라마의 선전 또한 눈부시다. 싸이가 ‘강남스타일’ 열풍에도 아쉽게 놓친 빌보드 정상 정복은 방탄소년단(BTS) 몫이었다. 2018년 앨범 차트(빌보드200)에 이어 2020년엔 메인 싱글 차트(핫100)마저 석권한다. 아직 그래미만 뚫지 못했을 뿐, 그들이 빌보드 1위에 오르는 건 이제 큰 뉴스가 아닐 정도다. K팝은 서구시장에서 통할 수 없다는 편견은 가차없이 깨지며 하나의 장르가 됐다. 한류의 원조인 K드라마에 날개를 달아준 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글로벌 신드롬을 낳으며 2022년 에미상(남우주연상, 감독상)을 정복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가히 한국 문화의 도장 깨기 행보에 화룡점정이라고 할 만하다. 노벨상의 권위가 그 어느 상보다 두텁기도 하거니와, 한국 문화가 대중문화를 넘어 예술적 영역에서도 세계 수준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작가 개인의 역량은 물론 문단과 출판계가 글로벌 독자들과 교감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엔 K팝,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한국 문화가 널리 전해진 것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러니 ‘최초’가 또 다른 ‘최초’를 낳는다. 누군가 앞장서 도장을 깨는 게 매우 위대하다고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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