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미국 대학 ‘소수 우대’ 위헌 파장
40여 년 만에 제거된 다양성 보호 수단
감소한 흑인… ‘소수 전락’ 백인 백래시
해리스가 수혜자? 정치권도 특혜 논란
편집자주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개성을 중시하는 미국인에게 다양성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특히 다양한 학생이 어우러져야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대학은 인위적으로라도 이를 확보하려 했다. 할당만 아니라면 학생 선발 기준을 조정해 인종 간 균형을 맞춰도 된다고 1978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허용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 뒤로 목표를 이루려 대학들이 활용해 온 도구가 소수 인종 지원자에게 가점을 주는 방식의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소수 집단 우대 정책)이다.
그러나 올해 미국 대학들은 저 정책 없이 신입생을 뽑았다. 지난해 6월 대법원이 “(성적이 우수한) 백인과 아시아계 지원자가 역차별당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2014년 비영리단체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FFA)이 인종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수정헌법 14조와 민권법에 입시 제도가 어긋난다며 하버드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를 상대로 낸 소송의 결말이 근 10년 만에 난 것이다.
MIT 흑인 신입생 비율 15%→5%
예상대로였다. 지난달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입학이 까다로운 대학 50곳을 살폈더니 4분의 3이 흑인 신입생 비율 감소를 겪었다는 미 싱크탱크 ‘에듀케이션리폼나우’(ERN)의 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NYT는 “전반적으로 흑인 학생들에게 가해진 영향이 가장 컸다”고 전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는 흑인 비중 감소폭이 유독 가팔랐다. 지난해 15%에서 올해 5%로 급감했다. 히스패닉(라틴계)도 이 기간 16%에서 11%로 대폭 줄었다. 반면 아시아계 비율은 40%에서 47%로 껑충 뛰었다.
양상이 비슷한 곳은 컬럼비아대였다. 20%였던 흑인 비율이 12%까지 떨어진 반면 아시아계는 30%에서 39%로 늘었다. 애머스트대와 브라운대는 흑인 비중이 각각 11%에서 3%, 15%에서 9%로 각각 빠졌다.
소송이 걸렸던 하버드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도 흑인 감소를 피하지 못했다. 하버드대는 18%에서 14%, 노스캐롤라이나대는 10.5%에서 7.8%로 각각 줄었다.
물론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국 정부가 대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각 대학에 서한을 보내 인종은 물론 출신 지역, 재정적 배경, 부모의 교육 수준 등을 두루 고려한 다양성 유지 프로그램을 가동하라고 주문했다.
몇 곳은 효과를 보기도 했다. 고등교육 전문매체 ‘인사이드하이어에듀케이션’(IHE)에 따르면 듀크대와 버지니아대의 흑인·히스패닉·원주민 신입생 비율이 지난해보다 커졌다. 프린스턴대와 예일대는 각각 9%, 14%였던 흑인 신입생 비율 유지에 성공했다.
특히 예일대는 ‘기회 지도’(Opportunity Atlas)라는 도구를 도입, 사회경제적 데이터를 십분 활용했다고 예일대 일간지인 예일데일리뉴스가 지난달 전했다. 기회 지도는 인구조사 구역에 맞춰 경제적 상황을 측정해 전국적으로 지도화(매핑)하는 프로젝트다.
저소득층 우대, 대안 찾는 예일대
지난달 13일(현지시간) 찾은 미국 코네티컷주(州) 예일대 캠퍼스는 가을 학기가 시작된 참이었다. 시설이 넉넉해 1학년은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고 한다. 수십 년 만에 인종 어퍼머티브 액션과 무관하게 입학한 이들이다. 그러나 인종 균형은 망가지지 않았다.
어퍼머티브 액션 폐지 전부터 예일대는 우대 기준으로 소득 문제를 주목해 왔다. 입학 지원자에게 학교 안내를 해 주는 예일대 2학년생 애니카 셰티아는 “예일대는 탄탄한 재정 능력을 토대로 1세대(해당 가정에서 처음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에 문호를 넓히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예일대 입학생 중 1세대 비율은 18%에 이른다.
코네티컷주 공공정보를 수집·공유하는 기관인 데이터해븐의 총괄책임자 마크 에이브러햄은 예일데일리뉴스에 “예일대의 성과는 저소득층 학생이 더 쉽게 입학하도록 여건을 만드는 정책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그는 전국적으로 흑인·라틴계 어린이는 55%가 저소득 가정에 살고 있는 반면 백인과 아시아계 학생이 그런 처지인 경우는 25%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물론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달 미국 CNN방송이 보도한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인 재커리 블리머의 연구 결과가 반면교사 선례다. 그는 1998년 어퍼머티브 액션을 금지한 캘리포니아주 흑인·히스패닉 학생 사례를 10년간 추적했는데, 정책 공백 탓에 그들의 임금이 5~6% 감소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진보정책연구소의 미국인 정체성 프로젝트 책임자인 리처드 칼렌버그는 IHE에 “MIT의 (흑인 신입생 비율) 급락과 예일대·듀크대의 상대적 안정성의 대조는 인종 다양성으로 가는 길이 어퍼머티브 액션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백인 기득권이 보호 필요한 소수일까
어퍼머티브 액션에 반대하는 명분은 대법원 설명대로 역차별이다. 또 그 대상은 백인이다. 흑인 같은 소수 집단이 보호 제도를 악용해 능력에 과분하고 노력이 수반되지 않은 성취를 얻어 간다고 보수 진영은 비난한다. 인도·자메이카계 흑인 여성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집권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자 어퍼머티브 액션의 정치 버전 격인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의 수혜자라는 딱지를 공화당이 붙이려 하는 것 역시 같은 논리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어퍼머티브 액션이 인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NYT 칼럼니스트 리디아 폴그린은 7월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J.D. 밴스가 예일대에서 혜택을 받은 저소득 우대(need-blind admission·성적만 고려하는 입학 전형)는 가장 강력한 어퍼머티브 액션”이라며 “인종보다 덜 눈에 띄기 때문에 이런 사실이 쉽게 간과되고 백인 남성이 성취를 이뤘을 때 능력만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하버드대의 정치학 교수인 스티븐 레브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작년 함께 펴낸 ‘소수의 폭정’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는 소수를 보호하는 제도와 특권을 가진 소수에게 부당한 이익을 제공하는 제도를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다인종 사회 미국이 과연 백인 기득권 구도를 깨뜨리고 소수 집단도 차별받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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