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1943.6.8~ 2024.4.28)
미국 상하원 의원 중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2024년 현재 총 97명(상원 17명)이다. 재향군인 하원의원은 전체(435명)의 18.4%로 건국 이래 처음 20% 미만이 됐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치른 세대가 의회에 활발히 진출하던 1965~75년엔 70%가 넘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도 50년이 지났다. 베트남전 베테랑 정치인 존 매케인(2018 작고, 공화)과 존 캐리(2013 임기 종료, 민주)가 이미 퇴장했고, 마지막 상원의원 톰 카퍼(Tom Carper, 1947~, 민주)도 11월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미국이 의회 선거 때마다 정당별 베테랑 당선자 비율에 주목하는 까닭은, 유권자들 특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중시하는 보수 유권자들이 군 경력을 국가와 시민,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과 희생의 유서 깊은 근거 중 하나로 여기기 때문이다. 퓨리서치센터 2022년 말 보고서에 따르면 현 재향군인 하원의원의 3/4 이상(62명)이 공화당 소속이고, 상원도 공화당이 10명으로 다수다. 마가(MAGA)’로 대변되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잡음과 파행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미국 양당 정치를 지탱하고 있는 힘의 바탕에 그런 게 있다.
다만 베트남전쟁은 지금도 논란거리다. 미국이 패배한 데다 2차대전과 달리 명분 없는 ‘나쁜 전쟁’이란 낙인까지 찍힌 그 전쟁은 톰 카퍼의 표현에 따르면 참전 군인에게도 “슬픈 전쟁”이다. 베트남전 병사들은 2차대전 선배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참전해 선배들보다 더 치열하고 잦은 전투를 치렀지만, 영화 속 ‘람보’처럼 전후 공식적인 환대도 존경도 받지 못했다.
‘미라이 학살’은 그 전쟁에 멍에처럼 얹힌, 창군 이래 최악의 전쟁범죄로 꼽히는 사건이다. 미 육군 보병 중대가 ‘미라이(My Lai)’라는 베트남 중부 해안 마을 민간인 504명을 학살한 사건. 군당국은 1년여 뒤 진상의 일부가 드러나고 나서야 자체 조사를 벌여 파병 3개월 차 초임 장교 단 한 명만 처벌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그가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1943.6.8~ 2024.4.28)다. 그는 전쟁의 명분과 전우의 명예에 오물을 끼얹은 장본인으로 손가락질 당했고, 한편에서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쓴 희생양으로 기억되곤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향년 80세.
1968년 3월 16일 이른 아침, 미 육군 23사단 11여단 20연대 1대대 찰리중대 병사 약 100명이 베트남 꽝응아이의 손미(Son My)지역 ‘수색 섬멸(search and destroy) 작전’에 투입됐다. 북베트남의 ‘설(Tết) 대공세’로 참담한 피해를 입은 직후였고, 미라이 마을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영향권에 든, 이른바 ‘핑크빌(Pinkville)’이었다.
그날은 지역 장날이었다. 선발대인 1소대가 전투 작전 대형으로 마을에 진입하던 무렵, 주민들은 마당에 불 피워 아침밥을 지으며 장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었고, 아무도 도망치거나 당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차별 학살이 곧장 시작됐다. 미 육군 범죄조사국 자료에 따르면, 미군은 M16 소총과 총검으로 주민들을 죽이고 집안으로 피신하면 수류탄을 던졌다. 공포에 떨며 모여 선 이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기도 했다. 후속 소대들도 당연히 학살에 가세했다. '작전'은 2시간 가량 이어졌고, 여러 건의 강간 살인도 자행됐다.
중대가 마을에서 노획한 무기는 소총 3정과 단파 라디오 한 대, 몇 건의 문서가 전부였다. 중대는 베트콩 128명을 섬멸했다고 보고, 지역 사령관 윌리엄 C.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의 찬사를 받았다. 그 작전 선발 소대장이 24세 소위 윌리엄 캘리였다.
묻히는가 싶던 그 사건은 11여단 헬기 사수였던 로널드 라이든아워(Ronald Ridenhour, 1946~1998)의 폭로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학살 사실을 소문으로 알게 된 그는 가담자 증언 등을 수집한 뒤 제대 직후인 69년 3월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국무부·국방부 장관, 의회 의원 24명에게 편지를 썼다. 뒤늦게 진상조사를 시작한 군은 9월 장성 2명을 포함한 26명을 기소했고, AP와 일부 신문이 네 문장짜리 단신으로 그 사실을 보도했다.
군 사진사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 1941~, 당시 하사)이 찍은 현장 사진도 학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군 공식 카메라 외에 2대의 개인 카메라를 휴대했던 그는 개인 카메라 필름을 가지고 제대, 고향 오하이오의 여러 클럽과 협회 등지에서 슬라이드 쇼로 현장 참상을 공개했고, 69년 11월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Cleveland Plain Dealer)라는 지역 매체에 일부 사진이 실렸다.
결정타는 탐사보도 기자 시모어 허쉬(Seymour Hersh, 1937~)의 69년 11월 ‘디스패치 뉴스 서비스’ 보도였다.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돼 조지아주 포트 베닝(현 Fort Moore)에 연금돼 있던 캘리와 그의 변호사, 부대원 등을 폭넓게 인터뷰한 그는, 시민 대다수가 아예 몰랐고 극소수가 전장의 흔한 ‘부수적 피해’ 정도로 알던 그 사건이 미군이 저지른 대규모 민간인 집단 학살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의 보도는 단숨에 세상을 뒤집어놓았고, 해벌의 현장 사진도 더불어 부각됐다. 허쉬는 이듬해 퓰리처상(국제보도)을 수상했다.
여론은 크게 양분됐다. 전쟁 범죄자 캘리를 엄벌해야 한다는 당위론과 캘리는 희생양일 뿐이라는 동정론. 재판 최대 쟁점도 후자의 입증 여부였다. 동성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은 캘리(당시 중위)는 군법정에서 시종일관 당시 중대장 어니스트 메드나(Ernest Medina 1936~2018) 대위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병사 다수의 증언도 그에 부합했다. 한 중대원(Harry Stanley)은 “(대위는) 주민 전부를 사살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고, 한 병사(Savatore LaMartina)는 “’숨쉬는 것은 모두 없애라’고 들었다”고 진술했다. “여성과 아이들도 죽이라는 말이냐’는 질문에 메드나가 “움직이는 건 전부 다”라고 답했다고 기억한 이(James Flynn)도 있었다. 하지만 군 법원은 "민간인을 죽이라고 명령한 적은 없다"던 메드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훗날 메드나는 “군과 국가의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완전히 솔직하진 못했다”고 시인했다.
캘리는 71년 3월 “최소 22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가 항소심(20년형)과 육군장관 감형(10년형)을 거쳐 74년 보석으로 풀려났다. 여론을 반영한 닉슨의 지시에 따라 군교도소가 아닌 포트베닝 독신 장교 숙소에 연금된 채 재판을 받은 덕에 그가 실제로 수감된 기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평생 시선의 감옥에 유폐됐다.
미 육군 레인저 출신 예비역 중령으로 미 육사 교수를 지낸 군사심리학자 데이브 그로스먼(Dave Grossman)은 2013년 번역 출간된 2004년 저서 ‘전투의 심리학’에 2차대전 참전 미군 1/4이 전투 중 바지에 오줌을 지렸고 약 1/8이 똥을 쌌다는, 국방부 보고서 내용을 인용했다. 화장실 갈 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합법 살인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야기하는 일반적인 반응 중 하나가 ‘배변-배뇨 조절 능력 상실’이라고 한다. 그로스먼은 최전선에서 실제 전투를 경험한 병사들만 조사했다면, 또 수치심 때문에 사실을 은폐했을 변수까지 감안한다면 그 비율은 약 절반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며 “당신들이 아는 모든 전쟁 지식은 5,000년 간 지속된 거짓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책에 썼다.
2023년 번역된 또 다른 저서 '살인의 심리학'에서 그로스먼은 군인의 3요소로 무기와 기술, 살인 의지를 꼽았다. 미 육군 예비역 준장인 전쟁사학자 새뮤얼 마셜(S.L.A Marshall, 1900~1977)이 2차대전 유럽-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400여 개 보병중대 병사 수천 명을 개별-집단 면접한 결과, 전투 현장에서 실제로 총을 쏜 군인은 전체의 15~20%에 불과했다. 인간은 사이코패스 등 극소수 정신이상자가 아닌 한 살인행위에 대한 보편적 거부감과 공포증을 지닌다.
그래서 유사 이래 군대는 군인의 살인 의지를 북돋우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명령과 처벌)와 심리적 개입, 즉 적을 비인간화-열등화하는 기법들을 개량해왔다. 무기와 함께 그 기법이 가장 급진적으로 발전한 것도 2차대전 전후 냉전기였고, 첫 시험장이 베트남이었다. 살인 의지의 교육-훈련 효과는 피교육자의 나이에 대체로 반비례한다. 베트남전 미군은 2차대전 참전 군인의 평균 연령(만 26세)보다 5세나 어렸다. 캘리도 '모범적으로' 훈련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미라이 비극은 모든 전쟁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윌리엄 캘리, 1971년 판결 직전 AP 인터뷰에서.
윌리엄 캘리는 2차대전 미 해군 베테랑으로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중장기 판매업을 하던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4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등 시절 답안지를 훔쳐보다 1년 유급했고, 팜비치 전문학교에서도 학점 미달로 퇴학당했다. 호텔과 식당 종업원을 거쳐 플로리다의 한 철도회사에 취업해 조차원과 기관사로 일하다 경미한 사고를 낸 뒤 회사에서 쫓겨났고, 64년 육군에 자원했다가 청력 장애로 거부당했다. 보험 조사원으로 일하던 그는 66년 7월 베트남전 병력 수요에 허덕이던 국방부의 재검 통지서를 받고 곧장 입대했다. 8주 기본 군사훈련과 8주 중대 서기 훈련을 받고 장교후보학교(OCS)에 차출돼 26주 장교 훈련을 이수한 뒤 67년 9월 소위로 임관,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베트남에 파병됐다.
미군이 설 대공세 이후 베트콩 거점 농촌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에 총력을 쏟던 때였다. 남부 메콩 델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속 특급 작전(Operation Speedy Express)’에서 보병 9사단은 1968년 12월부터 69년 5월 사이 공식 집계 1만 899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하지만 수거한 무기는 고작 748점에 불과했다. 미라이 학살 당일, 4대대 브라보중대도 미라이 인근 ‘미케(My Khe) 마을’에 투입됐다. 증언과 육군 문서에 따르면 그들 역시 아무런 접전 없이 3대의 기관총으로 무차별 예비사격을 가하며 마을에 진입, 화기와 칼 수류탄 등으로 민간인 155명을 학살했다. 미군 공식조사에서도 “사망자가 실제로 적군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 일로 기소는커녕 공식적으로 문책 당한 군인은 없었다.
1965~73년 베트남전쟁 기간 중 숨진 베트남 민간인은 100만~200만 명(베트남 정부 집계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미군 집계 민간인 대상 전쟁 범죄만도 최소 300건이다. 미라이 학살은 성실한 탐사보도와 사진 자료 등으로 피해 규모와 양상 등이 비교적 충실하게 밝혀진 사건이었을 뿐, 결코 예외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라이든아워도 훗날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미라이 사건을 물으면 ‘캘리 중위가 미쳐서 사람들을 몽땅 살해한 사건 아니냐?”고 답하곤 한다. 사실이 아니다.(…) 그가 미쳐서 학살한 사람 중 한 명인 건 맞지만, 그건 일탈이 아니라 작전이었다(an operation, not an aberration)이었다.”
허쉬와 인터뷰한 한 장교는 캘리를 ‘전형적인 겅호(gung-ho, 용맹한) 군인’이자 ‘좋은 녀석(fine boy)’이라고 평가하며 “그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한 군 관계자는 당시 군 최고위층이 전후 전범재판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육군은 언젠가 민간인 학살 문제가 불거질 것을 알고 있었다.(…) 군이 미리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었다.” 그들에게 미라이 학살은 어쩌면 역설적인 호재였다.
군 조사에서 일부 병사는 캘리를 “(전술적) 경험도 부족하고 지도와 나침반조차 사용할 줄 모르는 어리숙한 장교”였다고 진술했다. 만연한 징병 기피와 편파적 징병으로 인해 장교 인재 풀이 좁아져 부적격자들이 대거 전장에 투입된 점을 지적한 이들도 있었다. PBS는 “(하버드 출신 등) 좋은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다수 참전했다면 캘리와 같은 정서적 지적 수준의 인물이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다수가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무능한 초급 장교의 개인적 일탈이 빚은 예외적 참극이라는 공식적인 결론이 그렇게 뒷받침됐다.
하지만 하버드대 사학자 마셜 포(Marshall Poe)는 적과 민간인을 구분하기 힘든 전투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베트남전 증후군’, 즉 미쳐버린 나머지 피의 욕망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식의 평면적 분석을 부정했다. 1만8,000쪽에 달하는 미라이 학살 공식 문서와 증언 등을 분석한 그는 ‘미라이 학살과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란 책에 이렇게 썼다. “미라이의 군인들은 군중심리에 사로잡힌 생각 없는 짐승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 수행한 군인이었다.(…) 군 정보 당국도 민간인은 모두 장터에 나가고 베트콩 동조자만 마을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출소 후 캘리는 숨어살다시피 했고, 언론 사진 촬영 등을 피하기 위해 우산을 갖고 다니곤 했다고 한다. 국가가 부인하는 불의(의 명령)의 진실만이 욕된 삶을 버텨 살 명분이었을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한 자료는 없다. 그는 76년 조지아주 콜럼버스의 한 보석상의 딸(Penny Vick)과 결혼해 장인의 가게를 운영하며 아들 한 명을 낳았고, 2005년 무렵 이혼했다.
그는 2009년 한 국제봉사단체(Kiwanis Club) 초청 행사에서 처음 공개 사죄했다. “(명령과 별개로)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숨진 이들과 유족, 관련 미군과 가족들에게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한 매체 기자는 “비록 너무 늦긴 했지만 그의 사과는 베트남전쟁으로 초래한 모든 고통과 죽음에 대해 미 국방부가 했던 것보다 훨씬(far more than) 진솔한 사과였다”고 평가했다.
재판 기간 캘리는 AP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라이에서 행한 것과 그 전쟁에 참전한 사실을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라이가 전쟁이 무엇인지 전쟁을 막기 위해 세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건 매우 자랑스러울 것 같다.(…) 미라이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미라이 비극은 모든 전쟁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베트남에서만 있었던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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