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입소문
드라마 '조립식 가족' 영화 '보통의 가족' 등
'위태롭고 취약한 가족' K콘텐츠 화두로
"송민아, 네가 죽였어?"
범죄 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자 방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경찰서 취조실이 아니다. 그가 "대답해"라고 추궁하는 곳은 딸의 방. 딸을 살인범이라 생각하는 아버지라니. 부모의 의심으로 벼랑 끝에 몰린 딸은 책상에서 일어나 아버지 앞으로 다가가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되물었다. "엄마는 자살이라고 생각해?" 무덤덤한 딸의 표정에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MBC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속 프로파일러 장태수(한석규)와 그의 고2 딸 장하빈(채원빈·23)의 모습이다.
"엄마는 자살이라 생각해?" 한석규 굳게 만든 신인
채원빈은 서늘한 표정과 중저음의 목소리로 사이코패스 같은 섬뜩함을 보여준다. 그런 그는 한석규를 번번이 궁지에 몰아넣으며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2019년 영화 '매니지'로 데뷔한 그는 '스위트홈' 시리즈 등에서 조·단역으로 주로 출연했다. 데뷔 5년 차 배우의 예상치 못한 강렬한 연기에 온라인엔 "한석규에게 (기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 "고함 한번 지르지 않고서도 감정 표현의 깊이가 느껴진다" 등의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소속사 아우터유니버스 관계자는 "(채)원빈이가 드라마 속 하빈이와 너무 다르다 보니 '내 기존 모습을 연기 재료로 쓸 수 없다'며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채원빈은 이 드라마 주연 자리를 어떻게 꿰찼을까. 드라마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채원빈은 지난 1월 첫 오디션에서부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혼자 약 세 시간 동안 오디션을 봤다. 그후 서너 번의 추가 미팅 후 하빈 역에 낙점됐다. 송연화 PD는 "채원빈의 차가우면서도 미스터리한 눈빛에 반했다"며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느낌을 받았고, 감정 표현을 자제해야 하는 극 중 하빈이와 비슷하다고 느껴져 만나자마자 같이 작업하고 싶었다"고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첫 촬영 전 채원빈을 먼저 본 한석규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드라마에서 부녀로) 서로 많은 대화가 오갈 텐데 목소리 톤이 나와 잘 맞는다"며 까마득한 후배와의 촬영을 기대했다.
'정년이'보다 4050이 뜨겁게 검색
목소리 궁합이 잘 맞는 두 배우가 부녀로 출연하는 이 드라마는 의심으로 무너지는 가족을 잔인할 정도로 처참하게 그린다. 주변 인물의 잇따른 죽음에 아버지 장태수와 어머니는 윤지수(오연수)는 딸을 사이코패스라 의심한다.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는 정신이 황폐해진다. 한석규는 일정표에 수염을 깎지 않은 날 수까지 적어 촬영이 없는 날에도 면도하지 않고 무너지는 아버지를 보여줬다. 퍼즐같이 전개되는 미스터리를 배우들이 안정적인 연기로 촘촘하게 메우고, 감독은 흑백 누아르 영화처럼 가족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극의 비극을 키운다. 채원빈이 그를 의심하는 아버지 차 앞으로 걸어갈 때 그의 그림자가 갑자기 두 개로 갈라지는 식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가족과 믿음, 두 가치의 상충과 균열로 인한 심리적 지옥을 경찰이지만 아빠인 한석규의 딜레마에 시청자들을 동승시켜 몰입감을 높인 게 입소문을 타는 비결"이라고 봤다. 이 드라마가 범죄 스릴러 장르로는 이례적으로 중년 시청자의 몰입감을 키운 배경이다. 드라마의 소비 흐름을 보여주는 펀덱스에 따르면, 5~6%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40, 50대에서 드라마 관련 인터넷 검색 반응(2위·10월 14~21일 기준)이 평균 시청률이 두 배를 웃도는 tvN 화제작 '정년이'(3위)보다 높다.
①가족 소멸과 ②자기 객관화 실종 시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처럼 가족이 얼마나 위태롭고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콘텐츠는 요즘 잇따라 공개되고 있다. JTBC 드라마 '조립식 가족'은 성(姓)이 모두 다른 세 청년이 가족처럼 지내면서 겪는 세상의 편견을 보여주고, 영화 '보통의 가족'은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가족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통계청이 지난 7월 발표한 '2023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1인 가구 비율은 35.5%다. 가족의 배반을 다룬 콘텐츠 제작 흐름은 '가족 소멸'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선 부녀가 함께 식사하는 장면도 생경하게 그려진다"며 "가족의 배반을 다룬 콘텐츠의 유행은 가속화되는 전통적 가족의 해체와 그로 인한 세대 간 소통 단절의 반영"이라고 진단했다.
인공지능(AI)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동굴'에 갇혀 그걸 '진짜 세상'이라 착각하는 편향의 심화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읽힌다. 공희정 대중문화 평론가는 "내가 보는 대로만 믿는, 자기 객관화 실종의 시대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사회적 공포가 가장 친밀해야 할 가족에 대한 불신과 붕괴로 대중문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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