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교실 : 딥페이크 그후>
②가해자의 탄생
탈출구 줄어드는 딥페이크 범죄
'생활 반응' 쫓다 보면 범인 발견
피해자들이 잠입해 신상 추리기도
텔레그램, 수사 기관에 협조 가능성
본보 취재팀, 잠입했던 능욕방 신고
편집자주
그 아이의 일상이 지워졌다. 더는 SNS에 추억이 담긴 사진을 공유할 수 없고, 교실에서 친구들과 마음 편히 수다 떠는 게 두렵다. 댄서가 돼 무대에 서겠다는 꿈도 사라졌다. 지난여름, 우리 사회를 분노케 한 딥페이크 사건 피해자들의 지옥 같은 풍경이다. 사회적 관심은 계절이 바뀌며 싸늘하게 식었고, 홀로 남겨진 10대들은 더 기댈 곳이 없다.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스는 어린 피해자와 가해자가 유독 많은 국내외 딥페이크 사건 그 후를 추적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교실 안 풍경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내가 지금껏 합성하고, 능욕한 X이 수백 명인데 징역 안 갔다. 여기 '텔레'(텔레그램)잖아."
지난달 21일 한국일보가 잠입한 텔레그램 '지인능욕방'. 한 참여자가 불안한 듯 '여기서 딥페이크(불법 합성 이미지) 공유해도 정말 안 잡히느냐'고 묻자, 다른 참여자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그는 "짭새(경찰)에 조사받은 적은 있었지만 '누군가가 협박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진술했더니 정말 믿더라"라고 덧붙였다. 방 분위기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들은 주변 여성의 사진과 개인정보를 마음껏 교환했다. 초등학교 졸업 앨범 사진을 나체와 합성한 딥페이크 이미지는 물론 피해 여성의 이름과 휴대폰 번호, 집주소까지 올라왔다.
딥페이크 범죄가 활개 치는 바탕에는 '수사 기관에 잡힐 리 없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사이버폭력 실태조사'(2022년)에 따르면 10대들이 생각할 때 디지털 성범죄가 빈번한 이유는 △처벌이 약하고(26.1%) △붙잡힐 염려가 없기 때문(22.3%)이었다. 아이들은 딥페이크를 만들어 돌려봐도 텔레그램 등 해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거래하면 검거될 일이 없다고 여겼다.
실제 딥페이크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경찰서를 찾았다가 "범인을 잡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좌절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2020년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29) 검거 당시 수사팀장이었던 유나겸 제주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장은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범인은 반드시 실수하게 돼 있어요. 실수를 놓치지 않으면 다 잡힙니다."
본지는 전·현직 경찰과 사이버 수사 연구자, 정보기술(IT) 전문가, 직접 범인을 잡은 피해자 등의 이야기를 토대로 성범죄자가 언제가는 검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정리했다. 수사 기밀 노출을 피하기 위해 아주 구체적인 기법은 제외했다.
반드시 흔적 남겨…완전범죄는 없다
수사기관이 SNS에서 익명의 인물을 추적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선 ①온·오프라인에서 사람끼리 접촉하면 어떻게든 흔적이 남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범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실종되거나 잠적한 사람을 쫓을 때 활용하는 생활반응은 사이버 범죄자를 찾을 때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말했다. 생활반응은 사람이 신용·교통카드를 쓰거나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등 생활 중 남기는 흔적이다.
사이버 성범죄자들은 단체대화방에서 일상 생활에 대해 곧잘 언급한다. 예컨대 "오늘은 장염에 걸려 병원에 다녀왔다"거나 "어제 후배 4명과 모텔에서 술을 마시다가 여성을 강간했는데 경찰 조사가 걱정된다"고 남기는 식이다. 수사기관은 이런 발언을 토대로 해당 날짜의 진료 기록이나 112 출동 신고 기록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포위망을 좁힌다.
현실 공간에서도 동선 등을 끈질기게 추적하다 보면 범인의 덜미를 잡을 수 있다. 조주빈이 그렇게 잡혔다. 범죄 수익금 흐름을 쫓던 경찰은 공범이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 소화전에 현금을 놓고 가는 걸 확인했다. 잠복 끝에 다른 남성이 이 돈을 꺼내가는 걸 목격했고 그 남성이 조주빈에게 돈을 건네는 장면까지 포착해 이들을 체포했다. 조주빈은 "텔레그램을 쓰고, 가상화폐를 세탁해 인출하기에 잡힐 일이 없다"고 자신했지만 꼬리를 밟혔다. 조주빈은 징역 42년이 확정됐다.
'넘을 수 없는 벽' 텔레그램의 협조
②텔레그램이라는 '안락한 은신처'에도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 김성택 경기남부경찰청 사이버수사1대장은 "텔레그램은 최근까지도 수사기관에는 넘을 수 없는 벽 같았다"고 말했다. 아동 성착취물 공유방의 계정 이용자 정보를 달라고 요청해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창업자인 파벨 두로프(40)가 수사당국의 정보 제공 요구에 불응한 혐의 등으로 프랑스 경찰에 체포된 뒤 태도가 달라졌다. 텔레그램은 우리 경찰과도 핫라인(대화 창구)을 구축하고 수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범죄 소굴'인 텔레그램이 수사에 협력한다면 성범죄자는 숨을 곳이 더 줄어든다. 경찰은 그동안 텔레그램방에 잠입해 오래 지켜보며 정보를 모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텔레그램이 계정 가입자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 등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진우경 경찰청 사이버국제공조협력계장은 "사이버 수사는 최대한 많은 자료를 모아 교집합을 보고 파고든다"며 "텔레그램과 소통하게 되면 그만큼 정보가 늘어나기에 검거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취재팀이 텔레그램 측을 접촉해보니 변화가 감지됐다. 텔레그램 관계자는 본지에 "우리는 불법 포르노물에 대해 무관용 정책을 가지고 있다"며 "취재 과정에서 불법 콘텐츠를 발견했다면 링크를 공유해달라"고 요청했다.
③여론의 압박 속에 수사를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아동·청소년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일 때만 가능했던 위장 수사를 성인 피해자까지 확대하도록 규정한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
"가해자는 주변 사람" 피해자가 추적자가 되다
사이버 성범죄자가 경찰의 시선을 따돌렸다고 해도 안전할 수 없다.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다. ④수사기관뿐 아니라 피해 여성들과 이들을 돕는 시민들도 함께 추적한다.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는 할 수 없지만 '범인을 잡겠다'는 절실함이 크기에 집요하게 쫓아 신원을 알아내는 일이 늘고 있다
교사 이지희(27·가명)씨도 피해자끼리 모여 범인을 검거했다. 그는 2021년 7월 다른 피해 여성의 제보를 받고 텔레그램 지인능욕방에 잠입했다. 그곳에선 익명의 인물이 이씨 등 여러 여성의 나체 합성 사진과 전화번호 등 신상 정보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연락해 서로 겹치는 남성 지인을 추려 범인을 잡았다. 딥페이크 범죄는 대부분 지인을 상대로 저지르기에 조작에 쓰인 피해자 사진을 볼 수 있거나 찍을 수 있는 사람으로 좁혀가면 범인을 마주할 수 있다.
이씨는 다른 피해자를 돕기 위해 여전히 텔레그램방에 잠입해 증거를 모으고 있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10대 피해자는 성인에 비해 인맥이 넓지 않기에 범인은 대부분 같은 학교나 학원에 다니는 주변 인물"이라며 "증거를 하나씩 모으다 보면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범죄자가 텔레그램방에서 대화하지 않아도 흔적은 남는다. ⑤디지털 공간에서 숨는 수법만큼 추적하는 기술도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택 대장은 "완전범죄를 자신하며 도주하던 범인이 쪽지문(조각 지문)이 찍힌 고속도로 통행권을 버렸다가 검거되지 않느냐"며 "온라인 범죄자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버 쪽지문'을 많이 남긴다"고 했다.
사이버 보안은 돈이 되는 만큼 민간업체들도 범인 쫓는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린다. IT 보안 시스템을 만드는 김성환 쿤텍 이사는 "기술적으로만 보면 추적 못 할 사이버 범죄자는 없다"며 "다크웹(특정 브라우저로만 접속할 수 있는 비밀 웹사이트)에도 흔적이 남는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 능력·의지 들쑥날쑥, 적은 예산·인력 탓 '발목'
다만, 딥페이크 피해자 중 상당수는 "경찰의 집요함을 느낄 수 없었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일선 경찰서 사이버 수사관들은 실력이 고르지 않고 의지가 부족한 이들도 있다. 인력 부족도 심각하다. 유나겸 대장은 "SNS 본사에 가입자 정보를 요청하는 등 교과서적으로 수사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만, 한 사건을 오래 붙잡고 있기엔 수사팀 인력이 충분치 않다"고 토로했다.
수사할 돈도 없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지난달 20일 정부가 편성한 경찰 특수활동비 31억6,700만 원을 전액 삭감했다. 특활비는 딥페이크, 마약 등 기밀 유지가 필요한 수사를 할 때 필요하다. 김성택 대장은 "위장 수사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예산을 확보하는 동시에 수사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도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텔레그램에서 검거될 일은 없다"며 다른 참가자를 안심시키던 '지인능욕방' 참여자는 취재팀이 잠입한 지 36일째 된 1일에도 여전히 나체와 합성한 딥페이크를 올리고 있었다. 취재팀은 이 방을 포함한 2개의 지인능욕방을 텔레그램 측에 신고했다.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특별취재팀
팀장 : 유대근 기자(엑설런스랩)
취재 : 진달래·원다라 기자(엑설런스랩), 김태연 기자(사회부), 정다현 기자(코리아타임스), 이지수 인턴기자
사진 : 하상윤 기자, 류기찬 인턴기자
영상 : 박고은·이수연·김용식·박채원 PD, 김태린 작가, 김가현 인턴PD, 전세희 모션그래퍼
※<제보받습니다> 한국일보는 딥페이크 범죄 피해를 당한 아동∙청소년과 그 가족, 주변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딥페이크 피해와 그 이후 수사, 재판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학교 안팎에서 겪은 부조리, 2차 가해 등이 있으시다면 제보(dynamic@hankookilbo.com) 부탁드립니다. 제보한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집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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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믿을 수 없다
가해자의 탄생
아이들을 몰랐다
어떻게 싸워야 하나
dara@hankookilbo.com
정다현 코리아타임스 기자
dahyun08@korea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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